청개구리 딸
퇴근해서 돌아오니 93세 방에 새로운 핸드폰이 있다. 내 눈치를 보며 ‘핸드폰이 말을 안 들어서…’ 한다. 아니 그렇다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핸드폰을 바꾸다니
‘혼자 갔어요?’’
‘아니 옆집 할머니가 아는 데 있다고 해서 ‘
싸게 좋은 걸로 해 주고 핸드폰의 내용도 다 옮겨 주었다고 한다. 쓰던 핸드폰에 아무 문제가 없는 데 사용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보다 핸드폰이 오래돼서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 생길 것이 없는 것이 유튜브, 전화, TV 수신기의 이어폰 사용이 전부다.
한국에 와서 고향에 정착하니까 온 동네를 마음껏 다니고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이 있으면 연락이 쉬울 것으로 생각하고 사 드리고 나니, 귀가 어두워서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전화가 없는 것보다 더 답답하다. 다행히 본인이 필요하면 전화를 걸 수 있다.
처음 핸드폰을 사용할 때 사용료가 17만 원이 나온 적이 있다. 국제전화도 걸고, 전화를 걸어 놓고 끊지를 않아서 나온 요금이다. 각종 할인을 다 받고 기기 값을 뺀 요금이니 기가 막혔다. 93세는 전화기를 산 곳에 가서 노인이 무슨 국제 전화를 쓰겠냐고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다. 전화기 가게 사장님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국제 전화가 걸리지 않도록 장치를 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보청기를 끼고도 잘 안 들리는 93세는 75세, 69세가 없으면 집이 떠내려갈 만큼 큰 소리로 TV를 본다. 산책을 갔다 오다 들으면 옆집에는 TV가 없어도 될 것 같다. 69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TV와 핸드폰을 연결해 이어폰으로 듣도록 한다. 정말 다행인 것이 한국은 IT기술이 발달해서 핸드폰과 TV가 연결되어 핸드폰을 리모컨처럼 쓸 수 있고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아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TV를 볼 수 있다.
69세 핸드폰의 유튜브를 열면 제목이 ‘시어머니를 쫓아낸 며느리, 재산을 빼앗긴 홀시아버지의 눈물, 아파트를 빼앗기고 쫓겨난 친정어머니’ 이런 내용이 보인다. 이건 무슨 알고리즘이지? 알고 보니 93세의 핸드폰 계정을 69세의 이메일로 만든 것이다. 69세는 두 개의 핸드폰이 있는 것과 같다. 거기다가 69세는 크리스천인데 법륜스님, 황창연 신부님 영상이 자주 떠서 당황하기도 한다. 93세가 즐겨보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90세가 되어서 쓰기 시작한 핸드폰 작동이 쉬울 리 없다. 잘 되다가, 안 된다고 69세에게 가져온다. 손에 물기가 없어 스크린 작동이 잘 안 된다. 스크린을 터치할 때 손톱으로 탁탁 계속 친다. 손 끝에 침을 묻히라고 해도 그게 안 되나 보다. 69세가 몇 번을 이야기하고 짜증도 내지만 바뀌지 않는다. 93세의 결론은 핸드폰이 말을 안 듣는 것이었다.
핸드폰을 바꾸고 난 뒤가 더 문제였다. 여전히 핸드폰은 93세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150 gm (128GB) 짜리 핸드폰을 쓰다가 213 gm ( 256GB)으로 바뀌고 나서, 93세의 손목이 못 견딘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들고 있는데 무거워서 들 수가 없는 거다. 베갯머리 송사하듯 베개에 나란히 놓고 화면을 보려니 답답하고 힘이 든다. 결국은 일주일 만에 전화 상을 찾아갔다.
이미 산 핸드폰을 어떻게 바꿀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93세는 거금 5만 원을 18개월을 내야 한다며 억울해한다. 마음 같아서는 전화상에 가서 93세가 얼마나 쓸 거라고 256GB의 고급 사양을 판 것에 대해 따지고 싶었지만, 도와주려면 핸드폰을 살 때 도와주었어야 한다. 이 사건 이후 큰 깨달음이 있었는지 전에 쓰던 핸드폰에 불만이 없다.
69세는 병원에서 만나는 어르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고 농담도 한다. 93세에게는 그것이 안 된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잘 들리지 않아 소리치듯 이야기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기본 마음에 93세를 위한 친절이 세팅이 되어있지 않다. 어느 날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될 날이 있을 텐데 69세는 아직 그걸 실감하지 못한다.
디지털 튜터 교육을 받은 69세는 93세에게 사용법을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이 없다. 93세는 생돈 오만 원을 매달 지불하는 것이 속상해서 며칠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93세가 말하던 ‘핸드폰이 말을 안 들어서’라는 말의 속내는 ‘ 69세, 네가 내 말을 안 들어서’라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69세는 생각한다. 나는 언제쯤 엄마 말 잘 듣는 딸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