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행 저녁 비행기.
2022년 7월 23일. 여행일이 다가왔다.
나는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일상에 너무 매몰되어, 여행이라는 큰 자극마저도 마음속에서 무던하게 느껴지는 정신 상태였던 것 같다. 여행 하루 전까지도 별 다를것 없는 하루를 보내고 여행 당일이 되서야 배낭을 챙겼던것 같다 . 여행 가기 전 설레어 잠이 안 온다거나 여러 기대감이 이곳저곳 알아보는 것 없이, 새로운 곳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기때문에 여행의 실효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부턴가 여행 자체가 귀찮아지기 시작하고, 경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젊었을 때는 뭐든 경험해봐야 한다며, 스스로를 사서 고생시키기도 해 봤지만, 결국 남는 건 뿌듯함보다는 다신 이런 경험 하고 싶지 않다는 회의적인 다짐뿐이었다. 이번 여행은 내 자의보다는 지루한 일상에서의 나를 누군가가 꺼내 주는 수동적 여행인 느낌이 컸다. 친구가 나에게 먼저 이 여행을 제안했고, 그동안 특별한 할 일도 없을 것 같아 승낙을 했다.
여행날이 다가오고 인천공항을 도착하고 나서도 아무런 설렘이 느껴지지 않았다. 탑승 수속을 시작하니 어느 방송사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알만한 걸그룹의 멤버, 모델과 배우가 우리 앞에서 멘트를 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저들은 일하러 온 사람들이고, 그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본격적으로 탑승하고 나니 그 연예인 3명이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촬영 동의서를 승객을 상대로 작성을 했기 때문인데, 그제야 마스크 너머의 연예인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촬영 동의서를 작성한 후 이륙 전 안내방송에 맞춰 승무원들이 하는 수신호를 멍하니 바라보다, 비행기를 탄다는 그 자체의 즐거움보단, 5시간 동안 예정되어있는 기나긴 비행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도저히 즐거운 기분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비행기가 이륙하고 고도가 높아지며 느껴지는 적당한 압력이 몸을 붕 뜨게 만들었다. 마침 인천공항에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비 내리는 곳을 떠나 쾌청한 날씨의 휴양지로 도망가는 느낌도 들었다. 시간은 저녁 8시, 슬슬 밤이 다가올 때쯤, 태양은 밤기운에 적셔저 먹먹해진 구름들 사이로 점차 사라져 갔다. 여행 가기 전 아무 설렘도 없을 정도로 어딘가에 고민이 많던 나는 석양을 바라만 봤다.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어둠 속에 석양빛만이 하늘을 비추고 있는다. 이런 석양빛은 얼마나 애달프고 강렬하게 타는지, 하늘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하다. 구름 아래엔 바다가 주홍빛으로 물들어 따스해 보인다. 지평선에 닿는 구름은 수묵화처럼 먹으로 그은 듯하고, 섬들은 자신의 형체만을 남긴 체 그림자처럼 떠 있다. 석양이 올 때면 모든 것들의 색은 사라지고, 그림자 같은 형태만 남겨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비행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어둠이 잠겼다. 하늘 위엔 별들이 촘촘히 떠있고, 저 칠흑 같은 바다에는 어떤 것의 신호인듯한 인공적인 빛이 불규칙적으로 빛난다. 하늘 위에 있어도 별들은 멀게만 느껴진다. 구름마저 닿을 수 없는 검은 도화지 같은 하늘에 떠있을 만한 건 별밖에 없고.. 같은 고도에 있는 검은 구름 기둥은 이따금씩 형광빛을 번쩍 거린다. 번개가 구름에 갇혀 아우성을 치는 듯 하다.
어느 정도 비행기가 궤도에 이르었을 때, 나는 창문 밖 풍경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도 잠시뿐, 결국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맞다. 나는 눈을 감고 시간을 때우기 위한 잠을 청했다. 비행기가 코타키나발루 공항에 도착하고, 입국 수속을 밟게 되었을 때, 벌써부터 많은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 공항의 일처리 속도는 매우 느렸다. 열대 기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일을 여유 있게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공항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우리는 입국 수속에서 비행기 한편 정도 되는 승객을 1시간 30분 동안 일처리 하는 걸 보며 확실히 한국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탄 연예인 3 총사 역시 일반인과 다를 것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국의 땅에서는 한국에서의 지위가 큰 의미가 사라지는 듯하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코타키나발루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에 택시를 타며 힐튼으로 갔다. 코타키나발루의 첫 밤은 매우 고즈넉했다. 야간 비행을 끝낸 승객들과 같이 도시도 조용히 있고 싶은 듯했다.
다음날 계획은 우선 오전까지 호텔에서 여독을 잠시 풀고 오후부터 투어를 나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가까스로 힐튼 호텔에 도착하여 늦은 밤에 체크인을 했다. 나는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자진해서 엑스트라 베드로 배정받았다. 여행 온 기분을 내려는 일종의 시도였으나, 비가 내린 창문은 야경을 잘 보여주려 하지 않았고, 나는 이 여행을 온 것이 맞는가라는 작은 걱정을 안은채 이곳에서의 하릴없는 첫 밤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