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 디나완 투어.
스노클링 일정이 끝나고 나서 남은 3시간은 자유시간이었다. 3시간 뒤에는 우리가 미리 예약한 리조트인 샹그릴라 탄중 아루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전에 놀대로 다 논 데다가 말미잘에 쏘여버린 나는 더 이상 물놀이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해먹에 누워서 시간이나 때워야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가이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강력한 한마디를 했다.
"Storm is coming"
폭풍이라니... 실제로 섬 너머엔 회색 구름 기둥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비는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고, 유럽인 한국인 할거 없이 자기 물품을 챙겨 급하게 선착장으로 갔다.
사실 투어가 여기서 끝난다길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숙소 체크 인을 오후 3시부터 할 수 있는데, 지금 딱 투어를 끝내고 돌아가면 체크인 시간에 맞춰 숙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아다리'가 맞는 상황이었다.
나는 선착장에서 기다리며 유럽인들이 먼저 보트를 타고 떠나는 동안, 가이드랑 이야기 꽃을 피웠다. 가이드는 안전이 최우선이라며, 폭풍이 올 때는 무조건 투어를 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탈 보트가 오자, 비는 아주 거세지기 시작했고, 폭풍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섬으로 올 때 앞에 탔었던 게 아쉬워, 경관을 더 잘 보기 위해 보트 뒤 쪽에 자처해서 탑승했다. 그러면서 내 친구들에겐 똥폼을 잡으며, 헤밍웨이의 책 구절에 대해 얘기를 해줄려 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잡은 똥폼과 달리 이게 벌칙에 가까운 선택일지는 꿈에도 몰랐다.
보트가 출발하고,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루비라 그런지 얼굴에 미스트를 뿌리는 느낌이 나다가, 점점 배 속도가 빨라지고 비가 거세지자 내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때부터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다.
눈을 뜰 새없이 비와 바닷물이 덮쳐대니 나는 계속 어푸어푸 거리며 얼굴을 자꾸 손으로 씻어 내렸다. 폭풍이 임박해서 그런지 보트는 점점 빨라졌고, 파도까지 거세지자 보트에 물이 덮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애써 햇빛에 말려놓은 옷들이 의미 없게 돼버리고.. 나는 아예 직빵으로 맞는 처지였다.
내 앞에 앉은 여성분 둘과 가이드는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괜찮냐고 걱정을 해줬고, 나는 진심으로 '아임 낫 오케'를 연달아 말하며, 이 시각에도 나를 덮쳐오는 바닷물과 빗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제 하이라이트에 다다를 무렵 비의 세기와 바닷물은 마치 내 얼굴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따가움을 주었으며, 나는 속으로 괜히 뒤에 앉았다는 연신 어린 후회를 계속했던 것 같다. 보다 못한 가이드는 나보고 눈이라도 뜨라며 자신의 선글라스를 빌려주었고, 나는 겨우 눈이라도 뜬 채 항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마존 익스프레스와 흠뻑쇼를 합치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은 이미 다 젖어버렸고, 소울 리스좌가 하는 랩 말마따나 '다다 젖습니다'라는 아마존 익스프레스의 과격함을 나타내는 말이 실은 이 보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버랜드의 아마존 익스프레스는 컨셉이지만, 이건 '진짜' 폭풍이 만들어낸 어트랙션이었기 때문이다.
항구에 도착하고 나니 모두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고, 승합차 좌석엔 간이 우비를 깔고 앉았다. 가이드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능숙하게 대처를 했고, 결과적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아다리 맞는 일정은 덤이다.
우리는 이틀간에 투어를 마치고 이제 샹그릴라에서 이틀간의 호캉스를 즐길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리조트에 오니 애들끼리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차라리 밋밋하게 돌아올 바엔 이렇게 폭풍을 헤치고 온 게 더 추억 아니냐고.. 그래 내가 말미잘에 쏘인 것과 같은 논리다.
결과적으로 나는 폭풍도 만나고 말미잘에도 쏘이는 코타키나발루산 특급 경험을 한 거라 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