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곳조차 없다면
산양이나 순록이 두려움 없이 풀을 뜯는 비밀의 장소, 독수리가 마음 놓고 둥지를 트는 거처, 곤충이 비를 피하는 나뭇잎 뒷면, 땅두더쥐가 숨는 굴이 모두 그곳이다.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더숲, 2017
"왁왁왁왁"
"깨깽"
두 개가 짖는다. 큰 개가 얼마간 짖고 나자, 작은 개가 짖다가 이제는 둘 다 멈췼다. 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제 도착한 택배 안에는 여섯 권의 책과 사은품들이 가득했다.
영험한 약, 종이 북마크 세트B, 보냉백 두 개, 앨리스 토끼 3단 우산(주일 학교 아이에게 똑같은 우산을 준 걸 어머니는 모르시리라, 영원히!)까지 산타의 선물을 한 보따리 받은 양 내 눈과 손은 기쁨이 넘친다. 반대로 통장 잔액은 그만큼 더 줄었지만.
작년에도 출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천정, 화장실, 화분 받침대 등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그 녀석 때문에 한동안 고생이었다. 지금은 좀 차분하고 몇 번의 다툼 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감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집안을 다니면서도 그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산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 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른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가득 찬 광장에서 투우사와 싸우던 소가 지치면 사람들이 모르는 소만의 피난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곳을 스페인 어로 '퀘렌시아'라고 부른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퀘렌시아에서 쉬는 꼴을 못 보는 내 모습이 스쳤다.
"잡으려고 하면 재빨리 도망가서 딱 거기에 숨는 거야."
녀석이 어머니의 파리채를 피해 자신만의 퀘렌시아로 숨은 모양이었다. 늦은 저녁 화장실에 들리려다 퀘렌시아에 있는 녀석을 보았다. 거실과 테라스에 불이 꺼져 우리가 모르는 줄 알았는지, 여유롭게 한가함을 즐기는 모습 같았다.
화분이 여러 개 모인 목재 선반 끝 모서리에 앉아 달밤의 정취라도 맛볼 작정인가.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날 잡으려면 잡아보시지'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파리채를 들고 내리치니 빗맞았는지 녀석은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곤충이 비를 피하는 나뭇잎 뒷면'처럼 녀석들도 태어났고 살기 위해 도망치고 자신의 퀘렌시아에서 기운을 회복하는데, 나란 인간은 참으로 무참히도 그들의 퀘렌시아를 파괴했구나 싶어 찔린다.
그러나 나의 퀘렌시아는 벌레 없는 쾌적한 집인 것을 어쩌랴. 다같이 살기에는 너무나 민감한 사람이기에 우린 같은 퀘렌시아를 가질 수 없다! 퀘렌시아가 다른 이에게 들통났거나 파괴되었다면 아마도 또 다른 퀘렌시아를 찾아야겠지.
"삶은 자주 위협적이고 도전적이어서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상황들이 펼쳐진다. 그때 우리는 구석에 몰린 소처럼 두렵고 무력해진다. 그럴 때마다 자신만의 영역으로 물러나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추스리고,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