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판단하라

냉정을 되찾는 일

by 윤작가

오전 6시 40분. 알람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눈을 떴다. 이제는 저절로 눈이 떠진다. 마음이 번잡해서 다시 잠을 이루기가 힘들다. 그리고 가슴에 담긴 말이 많아 그냥 지나치기도 어렵다. 비가 오는 부활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그 놈이 보낸 이혼 소장을 받고 딸은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한숨을 쉰다. 딸 아이의 심경이 오죽 하랴. 어미로써 그런 얼굴을, 세상이 꺼질 것처럼 눈빛이 멍하고 양 볼이 푹 들어간 그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아득해진다. 어쩌면 좋으랴. 그러나 난 어미이기에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냉정하게 사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처음 소장을 받은 날은 그 자체로 가슴이 터질 듯이 골머리를 앓았고 분노가 일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니 그 놈이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고 증거도 없다. 일방적인 주장일 뿐. 그러면 우리 쪽에서는 아니라고 차분하게 대응하면 되는 것이다.

딸은 식탁에 앉아 한참을 끄적였다. 노트에 답변서를 쓰기 전,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그 놈이 오만방자하게 지껄이는 거짓말에 기막혀 했다. 베짜기의 능수였던 아라크네의 이마를 짚어 수치심을 집어 넣었던 지혜의 여신 아테나처럼 그 놈의 이마를 하늘이 짚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점점 본론으로 가는 것이리라. 놈도 우리도 정점으로 향하는 것이고 그러면 내려오는 날이, 해결되는 날이 올 것이다.

죽은 남편의 장례식에서 상주 노릇을 한 것을 가지고 지 놈이 할 일을 다했다고 적은 부분에서, '아무리 모자라도, 얼마나 적을 게 없으면 사위로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상주 노릇한 것을 잘 했다고 적었을까? 딸을 시집보내고 얼마 뒤부터 사위는 바깥으로 나돌았다. 후줄근한 딸아이의 옷차림과는 다르게 그 놈은 모자며 신발, 옷, 슬리퍼까지 브랜드로 휘감은 차림새가 수상쩍기도 했다. 그래, 지도 밖에서 힘들게 돈 버니 자신에게 보상하듯 그 정도로 마음을 위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못내 씁쓸했었는데...

딸 아이의 신용 카드를 훔쳐간 그 놈이 사용한 카드 내역서에는 가라오케며 단락주점이며 장어집이며 안마시술소의 상호들이 등장했다. 우리는 치를 떨었다.

'집에는 들어오지 않고 딸이 혼자서 힘들게 애들을 돌볼 때 네 놈은 세상에서 온갖 향락을 다 즐겼구나.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터진 입이라고 내 딸을 의처증으로 의심하고 거짓으로 협박하고 밤새 잠도 못 자게 방문을 걸어잠그고는 고문했느냐. 너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일이 다 끝나기까지 네 목숨은 붙어 있어야 한다.'

다시 열이 오르려 하지만 이제는 성낼 힘조차 남아 있지 못하다.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들어갔던 화와 분노가 오히려 더 냉정하고 차분하게 바뀌어 더 처절하게 써주리라 마음 먹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성숙하려는, 자신의 내부에서 무엇이 되려는, 세계가 되려는,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그 자신이 세계가 되려는 숭고한 동기입니다. 개개인에 대한 크고 엄청난 요구입니다."


어제 읽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나는 딸애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잘 될 거라 확신한다. 소장에서 그 놈이 허위로 주장하는 바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 딸의 답변을 듣고 안심했다. 웃었다. 같이 환호했다. 우린 거스를 게 없으니까. 창 밖으로 비가 후두둑 쏟아진다. 창문 위에 있는 비 가림막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나쁘지 않다.

릴케의 말처럼 나의 내부에서 그 무엇이 되려고 한다. 세계가 되려고 한다. 한 사람, 우리 딸을 위해서, 우리 딸의 자식들인 소중한 손주들을 위해 숭고한 동기로 한 세계가 되려고 한다. 시인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그것은 '개개인에 대한 크고 엄청난 요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제 벚꽃이 지고 잎들이 돋아나고 바닥에 꽃잎이 출렁이는 계절이 왔다. 평소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내가 벚꽃을 봐도 예쁜 줄도 모르겠다. 무감하게 쳐다보기만 한다. 공허한 눈빛으로. 모든 것이 아프고 모든 것이 쓰리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잊지 않으려 애쓴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만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그 놈이 까불면 까불수록 자신의 죄만 더 부추기는 꼴이니,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마주쳐서 이겨낼 것이다. 비가 와서 더 차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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