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나에게 네 번째 나라이다. 한국을 지나 호주, 영국 그리고 독일. 이렇게 네 나라에서 중장기 기간 동안 살아보았는데 생활적인 면에서 적응하기 레벨은 영국, 호주가 4-5점 정도 된다면 독일은 10점 만점에 7-8점 정도 되는 것 같다. 서류도 처리해야 할게 많고 뭐가 그렇게 깐깐한 게 많다. 그리고 독일어와 모든 것이 한 박자 느린 행정처리속도가 독일이라는 나라에 적응하는데 조금 더 어려움을 주는 것 같다.
어쨌든 지금까지 무사히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생존해왔다. B 도시에서 거주지 등록을 하고 산지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어간다. 나의 논문 진행상황과는 상관없이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 이 도시에서의 이사는 벌써 3번째가 되었다. 나의 머릿속에 있는 아름다운 계획은 항상 '집을 찾고, 집을 방문해본 후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고 나서 계약서를 쓴 다음에 문제없이 이삿날 집에 입주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째서인지 계획되로 되는 일이 참 없다.
3년 동안 3번의 이사를 했다. 1년에 한 집 꼴로 이동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첫 번째 집은 5개월 정도만 살았고 그 후에 두 번째 집에서 거의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B시에서 마지막이 될 (제발) 지금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첫 번째 집은 기숙사였다. WG 형태의 기숙사여서 학부생 5명과 함께 지냈는데 그때 친해진 친구들은 아직까지도 만나고 있고 내 독일어 성장에 큰 기여를 한 고마운 친구들이다. 첫 번째 기숙사는 쯔비셴미터, 즉 원래 세입자가 교환학생으로 방을 비운 동안만 내가 들어가 살기로 한 곳이었다. 그래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시작한 일은 새 집을 찾는 일이었다. 그 집이 바로 두 번째 집이었고, 이 집에서는 다른 독일인 룸메이트와 함께 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2인 WG였구나. 2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편했던 점은 룸메가 독일인이라는 거였다. 집에 관련한 어려운 문서나 해결할 문제가 생기면 항상은 아니었지만 룸메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남자 친구가 독일로 넘어오기로 하면서 난 새 집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집을 계약한 9월부터 12월까지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독일에는 보통 '새집' 또는 '새 아파트'가 별로 없고 새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도 별로 없다. 새 집이라 하면 보통은 새로 인테리어를 하는 정도랄까.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S반 (우리나라로 치면 전철?) 옆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새로 짓고 있는 집이었다. 그곳이 상업시설인 줄 알고 일 년 정도는 별생각 없이 옆을 지났는데 (일 년 동안 땅 만파고 있었다) 어느덧 새 집을 인터넷으로 찾고 있는 내게 그 주소의 건물이 딱 나타났다. 적혀있는 연락처로 전화해보니 공인중개사(Makler)가 전화를 받았다. 부동산으로 설명을 들으러 갔고, 일주일 정도 기다린 후에는 내 부족한 수입과 강아지 두 마리에도 불구하고 입주가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렇게 쉽게 계약을 할 수 있다니.. 놀랍고 신이 났다. 그동안 집을 구하느라 고생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이번 집은 왜 이렇게 쉽지?라는 두려운 즐거움이 생겨났다. 거기다 새집이고, 교통도 아주 좋은 곳이었다. 아니 너무 쉽고 좋은 거 아냐?
하지만 이 집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시작이었다. 10월까지는 분명히 집이 완성될 거라는 부동산 중개업자 분의 호언장담과 함께 8월 말에 계약을 진행했고 9월 중순쯤 집을 구경하러 공사 중인 건물을 방문했다. 그러나 집은 완성까지 아주 멀어 보였고 중개업자는 내게 입주 날을 뒤로 미루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래도 15일만 미루면 된다고 했고, 다른 세입자들도 옆에서 서명을 하기에 나도 서명을 쉽게 해 줬다. 두둥. 두둥. 두두둥.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고난의 서막이 울리고 있었는데 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로 입주할 집은 집주인과 직접 이야기하는 구조가 아닌 Hausverwaltung, 즉 부동산 관리업체가 중간에 껴있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나도 부동산 관리업체와 모든 대화를 진행해야 했는데 담당자는 아주 불친절하고 영어를 못했다. 집이 언제 완성될 수 있냐는 나의 질문에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지나가면서 본 집은 항상 완성까지 세 달은 남아 보이는 형태였다. 나는 입주 이틀 전까지도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남자 친구의 서류 문제도 해결해야 했는데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고 이사를 가서야 그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놈의 독일어.
그 와중에 이전에 살던 집주인은 우리의 페인트칠을 트집 잡았다. 독일은 이사를 나갈 때 대부분 집은 '원래 상태'로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페인트칠을 하고 나가기 마련인데, 내가 살던 집의 그전 세입자는 페인트칠을 하지 않고 나갔다. 그래서 우리도 '원래 상태' 정도만 해두고 가려고 한쪽 벽만 페인트칠을 했는데 집주인은 우리의 이삿날 이 집의 '모든 곳'을 페인트칠하라고 이야기하고 가버렸다. 아니, 원래 집 모양이 이것보다 심하면 심했지, 뭘 더 하라는 거야?! 친구와 불평을 터뜨렸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뒤로 이사 올 세입자를 아직 구하지 못해서 더 깐깐하게 구는가 보다, 생각하고 우린 다시 한번 날짜를 정해서 페인트칠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사는 동안에는 별문제 없이 잘 지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뭐. 페인트칠은 결국 두 번 했고, 두 번째에는 무사히 집주인에게 OK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보증금은 올해 말에 돌려준단다.
문제는 새 집이었다. 이사를 갈 수 있을지도 그 전날까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사 당일 하루 전날 저녁에 드디어 부동산 관리업체에서 전화를 해왔고, 새집 열쇠를 언제 받을 수 있는지가 확실해졌다.
이사에는 나와 남자 친구, 내 친구의 남편, 내 친구 두 명 이렇게 다섯 명이 투입되었다. 새집에 가니 우리가 살 집은 독일식 4층, 즉 한국 5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아직 완성이 안 되었단다. 대부분의 가구는 해체를 했지만 그래도 무거운 침대 매트리스와 옷장이 남아있었다. 짐을 옮긴 시간은 채 3-4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모든 짐을 계단으로 옮기는 일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보니 아직 문이 완성되지 않았다. 집 안에 있는 방문이 아니라 대문이 아예 없었다. 덕분에 강아지들은 남의 집에 (다른 집들도 문이 없었다) 맘대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다녔다. 다행히 저녁이 되기 전에 문은 달렸지만 집은 아직 완성된 형태라고 보긴 어려웠다.
이사를 하고 나서 며칠 동안은 나도, 남자 친구도 지쳐서 감히 짐을 풀고 집을 정리하는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대충 필요한 짐들만 꺼내놓고 가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집에서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전구를 달고, 이케아에서 주문한 가구들을 조립하고, 그 와중에 수업 준비도 해야 하는 정신없는 12월을 보냈다.
이사를 왔지만 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한 달 정도는 불편하게 지낸 것 같다. 세탁기가 배달 왔을 때에도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안 해서 아저씨들이 들고 올라오셔야 했고 발코니 완성도 멀어 보였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어느 정도 완성된 집을 보면서 요즘은 집에서의 생활을 아주 많이 즐기고 있다. 그때의 고생을 두 번 하고 싶진 않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꾸 잊어버릴 만큼. 친구들을 많이 초대해도 될 만큼 집은 넓어졌고 내 로망이었던 식기세척기도 있다(!!). 다행히 이사 올 때부터 부엌은 완성되어 있어서 걱정을 많이 덜 수 있었다. 이 집은 새로 지은 집이고, 내가 첫 세입자이기 때문에 공사단계에서 집주인에게 부탁해 월세를 매달 조금씩 더 내고 부엌을 짓기로 했다. 보통 독일은 이사할 때마다 자기 부엌을 떼어서 이사 갈 집에 새로 조립하는데 유학생인 내가 그렇게까지 하긴 무리이고 별 이익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집은 남의 손에 맡길게 별로 없다. 가구도 직접 조립하고 전구도 직접 달고, 부엌도 조립해야 하고, 심지어 화장실 거울까지도, 가끔은 변기 좌석까지도 직접 가져와야 하니까. 대신 친구들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이사할 때는 가족, 친지, 친구들 모두가 모여서 이삿짐을 나르고 가구를 조립한다. 그리고 도와준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이사 후에 먹게 될 피자와 다음번 자신들의 이삿날에 돌아올 품앗이 정도이다.
이제는 집에 들어오는 전기도 계약했고, 남자 친구 비자 문제까지 대부분 해결을 했다. 독일에서 잘 살아남으려면 누누이 되뇌지만 '인내'가 필요한 것 같다. 때가 되면 해결되는 문제가 많고 그 전까진 서류와 정보 등등을 잘 준비하면 된다. 이 집도 이사 이튿날까지 들어올 수 있을지 몰랐고 남자 친구의 비자 문제도 문제가 닥치면 해결해왔으니까. 집도 천천히 완성 중이니까. 초조함을 버리는 게 누구보다도 어렵지만, 매일매일 'Calm down'을 외치며 하루의 일상을 즐기고 있다. 그래도 다음 이사는 최소한 3년 후에 하는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