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집을 짓고 나서야 알았다
"은설아~ 놀자~"
오늘도 어김없이 일곱 살 아들은 옆집 친구를 불러낸다. 아파트에선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 외침을 아들은 도시 외곽의 어느 시골마을에 엄마, 아빠가 '집'을 짓고 나서야 비로소 경험하게 되었다.
30여 년 전 기억의 시선
30년 전 기억의 시선 속 나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의 어느 허름한 단칸방에서 다섯 명의 가족들과 살고 있었다. 지금 가보면 가로질러 눕기도 힘든 좁은 골목길에는 언제든지 부르면 나오는 앞 집 친구, 옆집 형, 뒷집 누나들이 있었고
"수창아~ 놀자~"
크게 한마디 외치면 아파서 끙끙 앓고 있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동네 친구, 형, 누나들은 "덜커덕"하고 대문을 박차며 나오곤 했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단독주택의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꽤나 많아진 그런 시대에 "아파트"가 아닌 작은 시골에서 "자그마한 마당이 있는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사실 아내와 함께라면 '집'은 땅속이던 밖이던 우리가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로 행복했었다. 그래서 우리의 신혼은 작은 빌라의 반지하 원룸에서 시작했다. 몇 년 후 땅 위, 그것도 무지 높은 아파트 12층으로 이사를 갔고 아내와 함께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즐거움, 땅위의 '집'을 만끽했다. 아내와 함께 몸을 뉘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던 '집'이라는 공간에 '꾸밈'이라는 것이 더해지면 더 나은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삶의 간이역을 거쳐 다다른 행복의 종착역엔
이렇듯 '집'이 있었다.
'집'은 그 사람의 인생관 혹은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고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대하는 태도, 배우자와의 공감, 자식에 대한 교육관,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등 무수히 많은 가치 및 행동양식을 그 사람의 '집'을 통해서 내다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13년이라는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일 혹은 가족을 위해 집을 열 번이나 옮겨 다니며 얻었던 건강한 사색 또한 작지만 포근했던 '집'을 통해서였다. 다양한 삶의 간이역을 거쳐 다다른 행복의 종착역엔 이렇듯 '집'이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서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 현실은 '회사'와 '집'이라는 공간에 나를 동시에 자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업무 특성상 1년 중 수개월 동안 장기출장을 떠나야 했고 "가족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진 아내는 점점 지쳐만 갔다. 직장 생활을 하며 얼마만큼의 재산을 모아야겠다, 어떤 차를 사겠다, 남들보다 더 나은 경제적 지위를 얻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나는 정작 내가 어떠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고 싶은지, 내가 행복해하는 일 혹은 잘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직장생활의 관성을 이겨내고 벗어나는 시도 자체를 두려웠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내와 매일매일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 대화는 그 어렵다는 직장생활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퇴사를 결정한 후 퇴직금을 모두 들고
우리 가족은 유럽의 아무도 모르는 시골마을에서
69일간 살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2015년 퇴사를 결정했을 당시 난 '퇴사'를 하지 않고서는 '직장'이라는 새장 속에서는 행복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디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퇴사를 결정했고 퇴직금을 모두 들고 아내 그리고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유럽의 아무도 모르는 시골 마을에서 69일간 살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https://brunch.co.kr/@bsjungblue/26
우리 가족은 잘 알려지지 않은 유럽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에어비앤비를 통해 한 달씩 살아보기로 했다. 네덜란드 티엘에서 한 달, 스위스의 빌트하우스 해발 1000미터에 위치한 산골마을에서 한 달을 보내며 '집'에 대한 우리 가족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 빈집털이를 당했던 기억은 지금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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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만 보던 스웨덴 북극권에서의 오로라를 직접 보았던 일곱살 아들은 여전히 그 때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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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집, 경제적 가치로서의 집이 아닌 '내 집'으로 향하는 그 길만으로도 행복한 엔돌핀이 솟구치는 '집' 그 자체로서의 '집'을 갈구하게 되었고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집'으로 귀결되곤 했다.
층간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현재가 상상 이상으로 윤택해질 수 있다는 것과
나의 집 마당에 쌓인 눈으로 만든 눈사람, 그리고 창문 캔버스에 펼쳐진 설경.
아파트에서의 삶이 무채색이었다면 주택에서의 삶은 유채색일 것이라는 믿음은 커져만 갔다.
네덜란드나 스위스가 아닌 대한민국에서도 이것들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책 없는 우리 부부는 처음 본 땅을
집을 짓기 위해 3시간 만에 계약해 버렸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후, 그 믿음은 하루하루 갈수록 커져만 갔고 내일이 아닌 지금 당장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되었다. 퇴사를 했고, 퇴직금은 모두 썼고, 수입은 제로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채 말이다.
'대책 없다'라는 말은 그야말로 우리 부부에게 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수식어였다. 여행에 퇴직금을 쏟아붓고, 생계유지를 위한 나의 일에 대한 계획도 없고, 게다가 통장잔고가 '0'원인 상태에서 우리 부부는 나들이를 위해 방문했던 양평의 어느 한적한 시골 주택단지의 토지를 덜컥 계약해버렸다. 처음 가 본 그 땅을, 운명처럼, 3시간 만에 계약을 해버렸다.
아내의 장점 중 하나는 추진력이다. 일단 결정하면 "~할걸 그랬어.."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녀의 결정에 후회란 없다. 곧바로 우리는 2년도 채 살지 않은, 우리 부부에겐 천문학적(?) 일 수도 있는 인테리어 비용을 들였던 아파트를 뒤도 안 돌아보고 매매했다. 토목공사를 시작하고 시공사와 계약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선택한 재료를 사용하는지, 설계대로 지어지고 있는지 매일매일 확인하기 위해 현장 근처에 월세를 얻어 살았다.
그렇게 '결이 고운가'는
약 6개월 동안의 집짓기 여행을 완수했다.
우리 가족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자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과정을 알고 지어도 쉽지 않은데, 잘 모르고 시작했으니 오죽했을까. '집 짓다 보면 십 년 늙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집 짓기를 여행이라 말했다. 매일매일 집 지을 땅이 바뀌고 형태를 갖추어가는 모습에 흥분과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짓기로 한 목조주택은 아내의 손에 의해 구석구석 설계되었다.
집 안 곳곳 아내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무씽크대, 평상, 식탁, 선반, 등 손재주가 좋은 아내는 거의 모든 가구들을 나무로 만들었다.
유튜브를 보며 독학한 '스케치업'이란 설계 툴로 설계를 완성하고 건축사를 통해 건축허가도면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땅이 완성되고 '결이 고운 가'의 설계가 완료되어 기초 땅파기를 시작하기 전, 동서남북으로 막걸리를 뿌릴 때에는 퇴사 후 '쉼'의 시간에 버금가는 선물 같은 설렘의 감정을 맘껏 누렸다.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토목공사와 집 자율 설계가 그렇게 쉽지 않았었는데, 착공이 되자 나무로 쉼 쉬게 될 '결이 고운 가'는 무서운 속도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목수님들의 경이로운 실력에 감탄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결이 고운 가'는 약 6개월 동안의 집짓기 여행을 완수했다. 주택단지 전체가 완공되지는 않아 주변이 어지럽긴 했지만 우리 가족은 '결이 고운가'에서의 설레는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이 고운가'에도 봄이 찾아왔다.
하루하루가 여행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집 외벽 등이 '결이 고운가'를 곱게 비추어 주었다. 마당 한편에 누워있던 반려견 '짱똘이'가 주인을 알아보고는 짖지 않고 꼬리를 세차게 흔든다. 고요한 밤 거실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나무로 지어진 '결이 고운 가'는 두 가지 음악을 선사한다. 갓 지어진 나무집이 자리잡기 위해 수축과 팽창을 하며 뒤틀리며 나는 소리, 그리고 비 오는 날, 빗방울이 징크 지붕을 가볍게 두들기는 소리는 두근두근 설레는 나의 마음에 흥겨운 리듬을 더해주기도 한다.
어느 해나 그렇듯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 번 봄은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봄이다. 혹독한 양평의 겨울동안 한껏 움츠렸던 '결이 고운가'에서 맞는 첫 봄. 눈이 가는 구석구석 '지금은 봄이야'라고 알리는 듯 피어나는 꽃들과 새싹들, 새 잎들,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큰소리로 친구를 부르는 게 행복한 7살 아들 , 식물 키우는 게 제일 어렵다던 아내가 즐겁게 가꾸는 소박한 정원과 텃밭,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캄캄한 길마저도 행복한 나, 퇴사 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마친 후 선택한 귀촌과 집 짓기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돌고 있는 우리 가족을 격려하듯, 칭찬하듯 그렇게 활짝 피어오르고 있다.
불혹, 귀촌, 집짓기, 퇴사, 평생직업,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돌고 있으며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평생직업을 찾기 위해 저지른 퇴사, 그리고 곧바로 기다렸단 듯이 나에게 불안과 두려움으로 엄습했던 불혹, 이 두려움에 맞불작전처럼 펼쳐진 귀촌과 집짓기, 돌이켜보면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거짓말처럼 이어져있었다.
집 짓기를 제외하면 어느 하나 끝나진 않은 여정이지만 예전처럼 폭풍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지 않고 여정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집'이 주는 힘이 가장 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집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집을 짓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난겨울 따뜻하게 우리 가족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던 집,
화사한 꽃들로 가득한 마당을 품고 있는 집,
집으로 가는 매일매일이 여행인 듯 속삭여주는 집,
아침이면 온 사방에 드리워진 햇빛으로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집,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그 집,
바로 '집'이 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