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칠은 내가 했지만, 싸움은 그들 몫이었다
중국 공장이 셧다운 되기 전,
6개월가량의 재고를 한꺼번에 수입해 오며
물류센터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지게차 통로를 제외한 모든 공간은
카턴 박스가 천장까지 차올랐고,
급히 외부 창고까지 임대해
수십억 원어치 재고를 밀어 넣었다.
나는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수입 일정과 통관을 조율하며
며칠간 기계처럼 움직였다.
중국으로 보내야 했던 생산 자재들이
수출길이 막히면서 국내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고,
장기간 고온다습한 환경에 노출되며
일부 자재에 녹이 슬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생산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왕감자 님, 자재 관리를 그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이걸로 어떻게 생산을 하라는 거예요?”
당황스러웠다.
그 자재는 내가 구매한 건 맞지만,
중국으로 곧장 수출 예정이었던 물량이었다.
나는 수요 예측과 수입 일정을 조율하는
재고 ‘운영’ 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보관 관리까지 책임지라는 식의 분위기였다.
“물론, 그 자재는 내가 구매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건 바로 출고될 수출용 자재였고,
나는 ‘운영’을 했지, ‘보관’ 책임자는 아니었다.”
창고 환경의 온습도 관리, 장기 적치로 인한 품질 유지까지
내게 넘기는 건, 소속 없는 책임 전가였다.
그 자재로 이미 일부 제품이 생산됐고,
결국 불량으로 폐기 처분되었다.
이 상태로 생산이 이어지면
전체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유관 부서 전원이 호출됐다.
C서비스팀, SCM팀장, 생산반장,
물류센터장, 그리고 각 팀장들.
회의실 안 공기는
말없이도 살얼음판 같았다.
“자재관리는 SCM에서 하는 거죠?”
“하지만 현재 C제품은 왕감지님이 전담하고 있잖아요.”
“자재관리는 현장에서 하는 거 아닌가요?
현장 관리 책임은 SCM팀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입출고만 하는 창고에서 기능직인데
무슨 관리를 해요.
관리는 관리직이 하는 거지"
말은 부드러웠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우리 잘못이 아니야’라는
메시지가 섞여 있었다.
책임은 공중에 붕 떴고,
나는 회의실 중앙에서 조용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일을 처리할 사람은
나뿐이 없다는 걸....
그날 오후 팀장님께 구두 보고 후
아무런 결재도, 문서도 없이
나는 노트북 하나 들고
다음 날부터 물류센터로 출근했다.
오전엔 물류센터 구석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오후엔 장갑을 끼고
자재 박스를 하나씩 열었다.
녹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붉게 번진 녹이 손끝에 묻었고,
기름기마저 마른 부품은
황무지처럼 메말라 있었다.
나는 샌더기로 녹을 갈아내고
윤활유를 덧칠하고
기름종이로 감싼 후
다시 포장해 재적재했다.
작업이 끝날 때마다
지게차가 필요했지만
가뜩이나 바쁜 현장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어려웠다.
결국, 지게차도 내가 직접 익혀 몰았다.
책임도, 실무도, 수습도 모두 내 몫이었다.
이 모든 일은
원래라면 SCM팀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됐을 문제였다.
하지만 SCM팀은 해체되었고,
업무는 조각조각 흩어졌고,
그 조각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내게 흘러들어왔다.
C서비스팀과 SCM팀 그리고 생산팀
그 사이에 낀 나는…
사실상 무소속 실무자
아니, 뭐든지 다해야 하는 실무자였다.
회의실에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현장에선 나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약 일주일간의 작업이 끝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느 팀 소속인가?”
“이건 정말, 내 일 맞나?”
서비스팀에 있지만 SCM 업무를 수행하고,
전 팀장의 방치와
현 팀장의 회피 속에서
나는 조직의 ‘사각지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SCM팀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업무는 남았다.
그 남은 조각들을
그냥 내가 주워 담고 있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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