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말보다 남겨진 숫자가 무섭다
“왕감자씨. 이거 정대리 물건 아니야?
한 달 전쯤 들어온 건데
왜 아직도 창고에 있어?”
물류센터장님의 말투는 반쯤 웃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당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ERP에도 출고 지정도 안 돼 있고…
이거 도대체 왜 안 나가?”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재고 수량은 시스템 안에서 조용히
‘그날의 실수’를 말하고 있었다.
당시 정대리는 하루에도 열 건 이상의 발주서를
쏟아내고 있었다.
한 명의 영업사원이
수십 개의 거래처를 담당하고
거래처 하나에서도 프로젝트가 여러 개였다.
문서 양식은 거래처마다 달랐고,
심지어 같은 거래처에서도
프로젝트마다 발주 방식이 달랐다.
그런 현장 속에서
영업사원이 보내는 발주서라면
나는 재고를 확인하고 바로 대응하는 게 일이었다.
‘확정’인지 ‘예정’인지
구분할 여유는 없었다.
그런 업무 환경에서 발주서는
일단 ‘진행’이 우선이었다.
확정 여부를 따질 시간도 없었다.
재고 확인 후
공급처에 발주를 넣는 게 내 일이었다.
그렇게 자재는 입고되었고,
창고에 차곡차곡 적재되었다.
ERP에도 이상은 없었다.
문제가 터진 건,
입고 후 두 달 넘게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그 재고를 회계팀에서도 발견했을 때였다.
“이거... 왜 아직도 미출고 상태죠?”
회계팀의 확인 요청 메일은
단순한 확인 요청이 아닌 추궁이었다.
ERP상 출고지정도 없고,
영업사원도 사용처를 지정하지 않은 상태.
그때서야 나는 과거 메일함을 다시 뒤졌다.
그리고 발견했다.
2주 간격으로 도착한
두 장의 발주서.
수량도, 품목도, 프로젝트명도 완전히 똑같았다.
단 하나 다른 건 날짜였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전자는 가발주,
후자는 확정이었다는 표시는 없었다.
정대리는 말한다.
“그거 전에 드린 건 확정 아니었어요.
그때 제가 예정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하지만
메일 제목에도, 파일명에도, 본문에도
‘예정’이라는 단어는 단 한 글자도 없었다.
그건 완벽한 중복 발주였고,
책임은 누구에게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문서를 실행한 사람인 내가,
그리고 문서를 작성한 정대리가
함께 경위서를 써야 했다.
시스템은 정리됐지만,
책임은 남았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모든 발주서에
‘예정’, ‘확정’ 표기를 명확히 요청했고,
ERP에는
출고 예정 재고 등록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팀 전반에 공유했다.
하지만 잔상은 오래 남았다.
말 한마디의 무게,
문서 한 줄의 결과.
‘말’은 사라지지만, ‘문서’는 남는다.
그리고 문서는 언제나
책임자를 향한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더 조심스러워졌고,
문서 한 줄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처음엔 억울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의 실수가
나를 한 걸음 성장하게 만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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