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가 인상 공문을 본 순간, 사무실 전체가 정적에 잠겼다
월요일 오전,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받은 메일 한 통.
제목은 간단했지만,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
[단가인상] QQ산업 공문 발송의 건
익숙한 공급처, 익숙한 문서 형식.
하지만 내용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었다.
“2020년 4분기 납품부터 단가를
15% 인상하겠습니다.
인상 수용 불가 시,
거래 유지가 어려울 수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그들은 통보했다.
협상이나 조율이 아닌,
거래 종료까지 염두에 둔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우리 회사의 최대 매입처였다.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영업팀, 재무팀, 생산팀, C서비스팀,
C제품의 SCM 실무자인 나까지.
회의실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 말했다.
"인상률이 얼마나 되죠?"
"15%입니다.
완제품 기준으로 10%는 올려야 해요"
“판매 단가를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연말까진 버텨야 해요.
내년에나 판매 단가 조정이 가능해요
명분이 없잖아요 우린”
판매가 인상은 힘든 상황.
즉, 매입원가 상승은 손해라는 의미였다.
다들 말은 아꼈지만,
해결책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결국 협상은,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그게 전부였다.
짧게 있었던
전임자의 인수인계 파일을 탐색하고
다른 제품군의 담당자를 찾아가
단가 협상 시 필요한 자료를 만드는 방법을
간략하게 숙지하였다.
나는 먼저 제품의 BOM을 열었다.
C제품의 원가 중
핵심 원료의 비중은 60% 이상.
국제 원자재 시세를 기반으로
데이터를 분석했다.
핵심 원료들은 연초대비
적게는 10%부터
많게는 60%까지
단가가 올랐다.
거기에 원화 약세로 환율까지
5% 이상 급등한 상태였다.
모든 요소를 반영한
체감 상승률은 30%에 육박했다.
그들이 15% 인상을 요구한 건,
터무니없는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그조차도 받아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며칠 뒤, 협상 테이블이 열렸다.
나는 준비한 자료를 펼치며 말문을 열었다.
“제품 생산을 위한 핵심원료의
급격한 단가 인상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회사 사정상,
단가 인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발주 단순화, 월별 고정 물량 보장,
대량 발주, 납기 연장 등
단가 인상을 막기 위한
다양한 옵션을 제안했다.
하지만, 거래처 사장은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 한마디에,
수십 시간 쏟아 만든 시뮬레이션이
조용히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1차 회의 이후
가장 현실적인 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며칠 후 2차 회의를 잡았다.
마지막 카드라 생각하고,
8% 인상안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저희도 가격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회사 사정상,
이 정도가 현실적인 최대치입니다.”
“대신 연말에 다시 테이블을 열겠습니다.
매년 해왔던 것처럼,
연말에는 판매단가 인상도 검토가 가능하니
그때 다시 조율할 수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그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연말 재협의 조건으로,
8% 인상 수용하겠습니다.”
손해를 보는 거래였지만
그들도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협상 후, 회사 분위기는 의외로 담담했다.
모두가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단가 인상은
서류 한 장으로 마무리되었다.
단가 인상 기안은 내가 직접 작성했다.
BOM 핵심원료 단가 분석,
시세 그래프,
환율 변동률,
조정 사유와
판가 인상 보류로 인한 예상 손실
시뮬레이션까지 포함해서...
그들에겐 그게 중요했다.
얼마나 손해인건지...
그 당시엔
그렇게라도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신년을 맞아
업계 1위 기업이
C제품군의 판매단가를 30% 가까이
인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장은 요동쳤고,
우리도 판매단가를
조정할 명분을 얻게 됐다.
그제야 나는 생각했다.
그날의 8%.
어쩌면 상대방은
애초에 15%를 던지고
8%를 하한선으로
설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계산 속에서,
나 역시 한 수를 배운 셈이었다.
그렇게 나는
숫자 하나에도 감정이 실리고,
협상엔 연습 없는 실전뿐이라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다.
그리고 조금은,
실무자라는 이름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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