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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Feb 20. 2018

돌담길 따라 흐르는 진도아리랑의 여음

청산도에서  1

1. 아라리가 났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에에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시집살이 잔말도 많다 

오다가 가다가 만나는 님은 폴목(*팔목)이 끊어져도 나는 못 놓겄네 

님 죽고 내가 살어 열녀가 될까 한강수 깊은 물에 빠져나 죽자 

오동나무 열매는 감실감실 큰 애기 젖가슴은 몽실몽실 

저 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진도아리랑 중에서)


진도아리랑은 여성 민요이다. 그래서 사설의 화자도 여자이고 그 내용도 여성들 삶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섬지방 여인네들 구김살 없는 신명이 풍부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다른 아리랑에 비해 독특하다. 애환과 애욕이 담긴 진도아리랑의 감성은 진도에서 비롯되었지만 청산도에서 그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느낌이다. '서편제'를 보면 쉽게 그것을 알게 된다.

‘유봉’은 ‘송화’에게 진도아리랑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진도아리랑’을 길에서 부르게 한다. 그것도 황토의 붉은빛이 넘쳐나는 돌담길에서 말이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멀리 산자락을 비추다가 금새 푸른 들판을 클로즈업하며 다가오더니 돌담길에 앵글을 맞추며 멈춰 선다. 이때 그 화면에 세 가족이 들어서고 마침내 애잔한 서편제 가락이 깔리며 척박한 황톳길에서 끈끈하게 살아오던 남도인의 구슬픈 정서를 솟구치게 한다. 그렇게 한없이 가락을 퍼 올리고 나면 이내 그 가락은 애잔한 눈물이 된다. 


소리를 찾아 쓰디쓴 인생길을 걷는 유봉(김명곤 분), 송화(오정해 분), 동호(김규철 분) 세 사람. 그들이 ‘세마치장단’에 실어 부르는 진도아리랑의 여음(餘音)이 그 돌담길 사이를 비집고 흐른다. 자진진양조인 ‘세마치’는 서양의 3/4 박자인 왈츠와 비슷하다. 그러니 돌담길에서 ‘세마치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추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세 사람의 모습은 후에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세마치장단’과 ‘왈츠’,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필연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사람이 살면은 몇 백 년을 사나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가 

구비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난다. 

소리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히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으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만경창파에 두둥둥 뜬 배.

어기여차 어야뒤어라 노를 저어라.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으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서편제를 위해 마련한 돌담과 황토길, 이곳에서 유봉, 송화, 동호가 진도아리랑을 부른다. 
서편제 세트장



임권택 감독은 감정을 가능한 절제하며 우조(씩씩한 가락)를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는 동편제와는 달리 발림(육체적 표현. 동작)이 매우 세련되어 있는 서편제를 그리기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황톳길이 안성맞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다. 임감독은 서편제에서 영화 속 여인이 아니라 삶의 한 유형으로서 송화라는 여인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판소리를 부르는 송화의 모습에서 지난 시절 청산도 여인네들 삶의 모습을 겹쳐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진도아리랑의 여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게다.


청산도의 풍경은 유채꽃 피는 4월과 청보리 익어가는 5월이 가장 아름답다. 돌담 사이로 보이는 청보리와 유채꽃들이 뿜어내는 빛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고향처럼 아스라한 풍광이 가슴 한편을 아리게 적셔오는 뭉클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놈의 아련한 돌담을 청산도에서는 모두 여자들이 쌓았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그뿐 아니다. 청산도에서는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산비탈에 논을 만들었는데 그 논마저 대부분 여자들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제주도만 그런 게 아니라 섬지방 특유의 삶의 방식이 배어있는 곳 청산도, 역시 돌, 바람, 여자라는 공식이 청산도에도 그대로 예외 없이 적용이 되고 있다. 청산도 풍광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이 여인네들의 한이 서려있기에 더욱 그렇다.


당리 유채밭



예전에는 청산도에서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서말만 먹으면 부잣집 처녀라는 소리를 들었단다. 그만큼 청산도 생활이 어려웠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청산도로 절대 시집보내지 말라고도 했단다. 이 섬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그걸 말해 준다.


그 옛날 청산도로 어여쁜 처자가 시집을 왔는데 시집온 첫날부터 시어머니는 새색시에게 12개의 밭을 매라고 했단다. 군소리 없이 하루 종일 밭을 맨 새색시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허리를 펴고 오늘 맨 밭을 세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보아도 11개밖에 되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설움에 겨워 복받쳐 울던 새색시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는데 일어선 그 자리가 바로 12번째 밭이었단다. 아마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청산도 여인네들의 생활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청산도에는 여인네들의 한과 흐느낌, 눈물이 배어 있다. 그게 바로 진도아리랑의 여음이다. 그 느낌, 그 기분을 느끼려면 가만가만 눈을 감고 걸어야 한다. 아름다운 서편제 영화의 장면 장면을 떠올리며 영화 속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야 한다. 진도아리랑의 추임새를 흥얼거리며 걷는 길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로는 부족하기만 하다. 


서편제에서 만나는 길들은 빼어나게 아름답다. 또 아름다운 만큼 서럽다. 서편제가 슬픈 로드 무비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송화가 가야 하는 소리길이 서러울수록 아름답고 아름다울수록 서러운 탓이기 때문이다. 서편제에서 카메라가 그 길을 그토록 오래 잡은 까닭은 이런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불안한 세 사람의 관계는 진도아리랑 가락에 묻혀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흡사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말이다.


청산도 여러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돌담길은 '아름다운 돌담길'로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2. 세마치장단과 봄의 왈츠


청산도를 찾은 여행객들은 당리 언덕에 올라 제일 먼저 서편제의 주인공인양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진도아리랑의 여음을 즐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는 갑자기 봄의 왈츠로 흥겨움을 더한다. 그러고 보니 나이 든 사람부터 젊은 사람들까지 청산도의 이 길은 함께 가는 길이 되어 있다.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봄날 이 길을 걸으면 누구라도 진도아리랑 춤사위를 따라 하거나 ‘봄의 왈츠’를 추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세마치장단과 왈츠의 조화로움, 참 멋진 발상이다.


당리 언덕에 있는 '봄의 왈츠' 세트장

봄의 왈츠 / 이수진 


나그네의 거친 몸짓에

이 몸 

주눅이 잔뜩 들어

몇 달을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둬야만 했던

연둣빛 분홍빛 음표들 

이제 웬만해진 나그네의 몸짓 

이즈음 꺼내

사랑하는 이와 흥얼거리며 

왈츠를 추고 싶나니

봄비여 

우리의 작은 음악 세계로 와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음표를 두드려줄 수 있겠는가


마늘밭 뒤켠으로 보이는 읍리 마을 전경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를 찍을 당시 당리와 근처 읍리 마을 지붕은 모두 새로 칠했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세트장으로 변한 셈이다. 청산도는 이름에 걸맞게 바다도 파랗고, 하늘도 파랗고, 산도 파랗다. 그래서인지 마음까지 파래지는 느낌이다.


봄은 그렇게 남쪽 바다로부터 오고 청산도에 머물고 있다. 굽이치는 파도는 남아있는 겨울 기운을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넘실대는 파도 위로 눈부신 봄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봄은 바다로부터 찾아와 푸른 보리밭과 마늘밭을 흔들어대고 갯바람을 앞세워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작은 산등성이에서 유채꽃밭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야말로 청산도에서 봄이 화사하게 춤을 추고 있다. 청산도는 봄이다.


봄이 가득한 청산도를 거닐다 보면 마을마다 쌓아놓은 돌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청산도는 돌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논둑이나 밭둑 모두 허리 높이까지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모습이 참 정겹다. 우물이나 당산나무 아래에도 모두 돌담이 쌓여 있다. 그 돌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과 그 밑에 옹기종기 피어있는 산딸기를 비롯한 야생화들 또한 싱그럽기만 하다. 


다른 섬들과 달리 청산도에는 제법 논이 많다. 그건 청산도가 상대적으로 물이 풍부하다는 증거이다. 청산도에는 다른 곳에 없는 구들장 논까지 있다. 다랑이 논은 흔히 가파른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으로 만든 논인데, 구들장 논은 물이 잘 고이지 않는 섬 특유의 환경을 감안해 논바닥에 돌을 구들처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들었다. 다락논과 구들장논을 보면서 그 옛날 청산도 여인네들이 치렀을 고통과 애환의 역사가 어쩌면 물을 가두려고 쌓은 축대 사이사이에 붉고 화사하게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청리와 읍리의 다랭이논
도청리와 동촌마을, 그리고 신풍리 구들장논
도청리 구들장논



다랑이논의 높이가 무려 2m가 넘는 곳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축대 곳곳에 피어난 들꽃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저 축대에 배어있는 여인네의 한과 그 고운 손길로 퍼 날랐을 흙이며 돌조각 하나하나가 참으로 안쓰러운 느낌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지막한 언덕에 활짝 핀 유채는 한창 봄을 그리고 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청산도는 진도아리랑의 여음을 간직하게 된 아름다운 섬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청산도의 아름다움이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청산도는 10여 년 전 이미 ‘슬로시티’ 국제인증을 받았다. 슬로시티 국제연맹은 현장 실사를 거쳐 청산도를 비롯해 신안군 증도, 담양군 창평, 장흥군 유치 등 전라남도 내 4곳을 슬로시티로 지정했다.(* ‘슬로시티’란 전통 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미국형 효율지상주의와 패스트푸드에 기초한 ‘패스트 라이프’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의 정신이 확대된 개념이라고 하겠다.) 


청산도가 슬로시티로 지정된 것은 현대 문명에도 불구하고 청산도의 구들장논, 다랑이논, 초분 같이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 역시 청산도 돌담길에 흐르는 진도아리랑의 여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음은 유채꽃 만발한 돌담길 옆을 지나 이번에는 마늘밭 한가운데 봉긋 솟은 무덤가로 인도한다.


청산도를 걷다 보면 남녘 섬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장례 풍습을 만나게 된다. 바로 풍장이다. 풍장은 글자 그대로 바람에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다른 무덤이 필요하다. 바로 초분이다. 초분은 풍장을 위해 존재했다. 청산도 초분은 남해나 서해 섬마을에서 주로 행하는 장례의식 중 하나이다. 이때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덮어놓는다고 하여 초분이라고 부른다. 이 초분은 3년 후 다시 해체, 시신의 뼈를 드러내 깨끗이 하는 '씻골'을 거쳐 땅에 묻는 '본장'을 한다.


초분 풍습이 생기게 된 것은 상주가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 갑자기 상을 당했기 때문이거나 영혼이 자기가 살던 땅에서 시간을 잠시라도 더 보내게 하기 위해서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번 지내기도 힘든 장례를 두 번씩이나 하는 것은 보통 정성이 아니면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어쩌면 부모님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죽고 나서라도 하라는 하늘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초분 문화는 1900년대 초 까지만 해도 도서지방은 물론 육지에서도 간간이 행해졌는데, 일제강점기 화장을 권장하면서부터 남해와 서해 일부 도서지역에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벌이면서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밭 한 가운데 있는 도청리 묘지들
청산도 슬로길 2코스 사랑길 초입에 있는 초분 체험관과 인근 숲속에 있는 초분



풍장(風葬) 1/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우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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