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Feb 21. 2018

돌담길 따라 흐르는 진도아리랑의 여음 II

청산도에서  2


1. 청산도 범바위의 비밀


유채꽃 만발한 청산도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그 빛깔이 아주 독특한 색깔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색의 공간으로 푹 빠져 들게 만드는 쪽빛이다, 아니 푸른 수국 꽃이 그 꽃잎을 바다에 드리우는 바람에 수국 물이 들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도 푸르른 ‘청산도’를 노래했다. 그 속에 깃든 ‘푸르름’이 우리를 물들게 한다.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훨훨훨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박두진 시인의 ‘청산도’ 중에서)


청산도의 ‘청산(靑山)’은 하늘, 바다, 산이 모두 푸르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빼어난 자태 때문에 고려 때는 청산도를 일러 ‘선산(仙山)’, ‘선원(仙原)’이라고도 불렀다. 어쩌면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리얄리 얄라셩”이라는 ‘가시리’도 이런 청산에서 자지러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4월초 청산도 당리마을에 마늘과 청보리, 그리고 유채가 한창이다.



그 짙푸른 신록의 결정체가 마치 햇살에 부딪쳐 부서지는 이슬방울처럼 바다에서 반짝인다. 참으로 환상적인 풍경이다. 그래 역시 청산도는 푸르른 섬이다. 그런데 그 바다, 그 푸른 바다로 넘실대며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다. 소리의 물결이다. 미황사 스님들의 굿거리(군고) 장단이다.


파도는 넘실대며 오랜만에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젊은 남녀의 물수제비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또 그 바다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이야기 주머니를 열어 보여주며 환각에 빠지게 한다.



미황사(美黃寺) / 강제윤


스님들은 모두 달마산을 떠나 바다로 갔다

어란에서부터 배는 가뭇없이 흔들린다

출렁이는 섬들 섬들 섬들

서역에서 온 스님처럼 스님들은 가랑잎을 탔다

사십개의 몸을 실은 잎 잎 잎

저 수십수백의 섬을 돌고 돌아 경을 외고

배는 청산도 앞에서 큰바람을 만난다

닻을 내리고 스님은 뱃머리에 올라 먼 곳을 본다

스님들은 노 젓던 손을 멈춘다

저 거대한 물결 물결 물결


기립하여 사십의 스님은 목어를 친다

이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폭풍 속으로

닻줄을 자르고 스님들은 몸을 던진다


(* 이 시는 실제 160년 전 청산도 인근에서 발생한 사건을 강제윤 시인이 시로 표현한 것이다.) 160년 전 청산도에서 일어난 조난사고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 있을까?


진산리 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아침바다



160여 년 전 미황사 스님들은 중창불사를 하려고 ‘군고’를 꾸려 해안을 돌며 일종의 공연을 하고 시주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설쇠를 맡은 스님이 어여쁜 여인네 꿈을 꾸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오늘은 쉬자”라고 했으나 주지스님이 듣지를 않는다. 그들은 중창불사를 위한 군고단(軍鼓團)을 이끌고 청산도로 공연을 하러 가던 중 끝내 설장고를 맡은 스님 한분만 살아남고 나머지 스님들 모두가 파도에 휩쓸리고 죽음을 맞는다.


남은 것은 절에 남은 나이 든 스님 몇 분과 ‘군고’를 꾸리느라 진 빚더미뿐. 그래서 미황사는 그때부터 쪼들리고 스님 40명 이상이 속해있던 그 위세는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대흥사 말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온 검은 소가 점지한 절집, 천년고찰 미황사는 한때 도솔암, 문수암 등 열두 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바다의 노여움인지 미황사는 그 위세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해남 출신 주지 혼허(渾虛)를 비롯한 스님들 40명이 바다에서 몰살당한 전설이 있은 후부터이다. 그래서 미황사 아랫마을 서정리에서는 지금도 비바람 치는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두고 “미황사 스님들 궁고친다”라는 말을 속담처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황사의 지난 사건을 들먹이는 것은 다름 아닌 청산도에서 미황사 스님들이 조난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사건의 전모를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스님들이 탄 배가 청산도 인근에서 조난을 당한다. 그런데 정확히는 청산도 남쪽 상섬 인근 바다에서 스님들이 탄 배가 전복되어 수장되었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도 상섬 인근 해역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한 흔적이 많다. 흡사 미국 플로리다 인근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말이다.


1973년 미국 해안 경비대 발표에 따르면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100년 동안 약 8,000건의 조난 신호가 발생하였고 많은 배와 비행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버뮤다 삼각지대를 4차원으로 가는 입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청산도의 상섬 인근 해역이 바로 그런 곳인지도 모르겠다.


보적산 정상에서 바라본 범바위와 주변 경치
범바위 언덕에서  바라다 본 상섬
멀리서 바라본 범바위, 그 자체가 거대한 자철석이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지난 몇 해 사이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해양경찰청 보고에 따르면 2006년 2월 7일 청산도 인근에서 ‘센츄리 팀’(Century Team)호가 조난당해 완도항으로 예인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1월 1일에는 개인 소유의 타면조종형 초경량 비행장치(Micro Streakshadow)가 비행 중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 인근 바다에 불시착하였는데 조종사는 다행히 주변을 항해 중인 선박의 선원들이 구조했으나 사고 비행기는 바다에 침몰, 실종되었다고 한다.


해남군 부근 육지에서 해안으로 진출할 때 조종사는 항공기 앞바퀴 근처에서 “쿵”하는 소음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약 20분 후 청산도 상공에서 다시 소음을 들었다는데 스트릭 쉐도우의 비행경로가 좌우로 이탈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조종사가 휴대한 GPS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스트릭 쉐도우의 기수 방향을 일정 방향으로 잡아놓아도 비행기는 좌나 우로 벗어났다는 것이다. 조종사는 비행기의 방향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청산도는 자석의 자기장이 변하는 곳인데 전세계에 이런 곳이 3곳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주 커다란 바위가 하나의 큰 자석이 되어 나침판의 남북 표시가 자기 마음대로 변하는 곳이다. 청산도 남동쪽에 위치한 범바위와 상섬. 묘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둘만 알고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둘 사이에는 전자파 장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나침반은 물론이고 휴대전화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작은 배들이 운항을 꺼리는 지역이라고 한다. 청산도에서는 나침반이 방향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해용 지도에도 "주의! 청산도 부근에는 지방자기의 교란이 존재함"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범바위 부근에 나침반을 놓아보면 실제로 나침반이 범바위만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흡사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에게만 꼽히는 그 시선처럼 말이다. 어쩌면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다 쫓겨난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변치 않게 하려고 범바위를 그들만의 이정표로 만들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정말 나침반이 교란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지구 내부의 자성이 많은 자철석 성분의 암석이 주위에 분포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청산도 앞바다는 주위나 해저가 이런 자철석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산도의 자성이 지구 자기장 보다 강하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자기 오류'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청산도에서 잠시나마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옴직한 그런 일들을 겪으며 놀라운 사실에 잠시 가슴이 뛴다. 그러나 청산도의 진짜 매력은 공포영화처럼 괴기스러움이나 흥분 등의 단어가 아니다. 엄청난 자기장이 우리에게 방향 상실과 무기력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향 상실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장을 헤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다 보면 멋진 신세계에 닿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청산도에서는 언제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청산도 여행의 진짜 별미이다. 이제 청산도 여행의 진미가 바로 ‘느림’의 미학’ 임을 깨닫게 된다.


해안가 도락리 마을에서 바라본 당리 언덕과 도정리 다랭이논
양지리 마을 전경



2. 거북을 닮은 청산도


돌담길만큼이나 청산도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섬에 대한 풍수지리이다. 모든 역사의 시작이 신화를 바탕으로 하듯 청산도의 역사도 신화에서 시작을 한다. 사라진 신들의 섬 아틀란티스처럼 청산도도 어쩌면 신들의 섬이었는지 모른다. 그 옛날 청산도는 사슴과 노루가 뛰어놀고 온갖 꽃들이 만발한 그런 섬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청산도가 아니었던가.


아주 먼 옛날, 하늘나라에서 한 마리 거북이 천인을 태우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한다. 그 거북이 내려온 곳이 바로 청산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자세히 보면 청산도는 어느 곳에서든지 바다 쪽 포구를 바라보면 대부분 거북이 형상으로 보인다. 다른 섬에서 볼 수 없는 참으로 특이한 모습이다.


청산도 남서쪽에 위치한 화랑포를 권덕리 마을의 범바위나 구장리 마을의 앞개에서 바라보면 누구나 거북이 형상이라고 금방 알 수 있다. 거북이는 영묘한 동물이다. ‘물명고’에는 머리, 꼬리, 네 발을 한꺼번에 감출 수 있다 하여 ‘장육(臧六)’이라 하였고 ‘거복(居福)’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살아있는 복덩어리라는 뜻이다. 거북은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는 십장생의 하나이기도 하다. 풍수의 속설에 거북의 꼬리 부분에 접해있는 마을이 잘 된다고 했다. 거북은 꼬리 부분에서 알을 낳기 때문에 그 정기를 받아야만 다산과 풍요를 약속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산도는 화랑포라는 금거북꼬리에 마을들이 매달린 형국이란다. 알을 낳기 위해 뭍에 오른 거북이 청산도라는 알 무더기를 낳고 바다를 바라보는 영구망해형(靈龜望海形)이요, 금구망란형(金龜望卵形)의 빼어난 길지라는 것이다.


청산도의 매봉산 매와 보적산 범바위의 호랑이는 금거북이 알을 지키는 수호천사들 일지 모른다. 하늘에서 날아드는 알 도둑은 매봉산의 해동청 보라매가 지켜내고 뭍이나 물에서 달려드는 적은 범바위의 산중호걸 호랑이가 찌렁찌렁한 포효소리로 지켜낸다. 풍수에서는 이렇게 격이 어울리는 형세가 구비되어야 승지(勝地) 요 명당이라고 한다.

보적산 정상 아래 있는 범바위
보적산 정상에서 바라본 화랑포



그런데 청산도의 그 멋진 명당을, 화랑포의 해안절경을 따라 일주도로를 내겠다고 거북의 알이 달그락 거리는 해안가를 온통 시멘트로 발라댄 길을 걸어야 한다. 그만 넋을 잃고 명당을 명당으로 간직하지 못한 무지 앞에 어찌해야 하는지 망설임과 회환 때문에 길을 멈추고 만다.


이건 청산도 수호신인 호랑이가 숨어있는 범바위에 올랐을 때도 그랬다. 바로 범바위 근처 매봉산 정상 부근에 세워놓은 ‘농수산물판매센터’라는 건물이 숨을 멎게 했다. 무심코 전망대를 지은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산꼭대기에 건물이라니, 스스로 청산도 맥을 끊는 어처구니없는 짓거리가 아닌가.


아름다운 청산도에서 안쓰러움과 무지에 대한 회의감이 뒤섞이며 무거운 회한을 만든다. 이게 다 화사한 봄이 주는 파장이라고 해야 하는지 정말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역시 봄은 봄인가 보다. 그러니 잠이 올리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서서히 청산도에 해가 진다. 차라리 어둠이 내리고 나면 흡사 눈이 온 산하를 감추듯 청산도의 밤은 환상의 나래를 덮어쓰게 될테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밤이 더 아름다운 곳이 청산도이다.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 김종해


사라져 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


멋진 일출을 고대했건만 간밤에 부는 바람에 태양은 여명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문득 어디선가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날 버리고 가시는 님 가고 싶어 가느냐”는 여음이 들려온다. 어두운 밤에도 진도아리랑의 여음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어둠이 내리고 나면 청산도는 또 다른 상상의 세계로 변하고 만다. 지친 상혼들은 이제 안심하고 깊은 수면을 즐겨도 좋을 것이다. 길고 하얀 미리내의 물결이 꿈길을 달려와 밤새 물결을 이루고 춤추며 내일로 인도한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쏟아지다 못해 산 중턱에 겹겹이 쌓이기까지 한다. 그 별들은 온갖 벌레들의 화신이 되기도 하고 화들짝 나를 미망에서 깨우고 또다른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쏟아지는 유성들, 별이 쌓인 산, 빛나는 밤바다, 천지를 울리는 파도소리, 그 소리에 몸을 굴리는 갯돌, 개구리 소리, 온갖 벌레소리와 우주의 신비로움. 모두가 청산도에 흐르는 진도아리랑의 여음이다.


참으로 밝은 달빛이 비추는 맑은 밤을 가로질러 서편제의 봉화처럼 흘쩍 길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밤바다가 내뿜는 빛은 신비로움을 더하고 보기 흉한 콘크리트 농로마저 쏟아지는 달빛에 한발 한발 서둘러 내딛고 싶은 눈길로 변한다. 누군가 겉저고리를 벗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라고 자꾸만 충동질을 한다.


어쩌면 달빛 밝은 날 청산도에서는 한밤중에 오작교에 떨구고 간 그미의 신발 하나를 들고 찾아온 그이를 만날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밤중 산길을 걸어도 무섭지 않고 흥이 날 것 같은 섬, 청산도.


한밤의 축제가 서서히 끝나갈 무렵 온갖 욕정을 이겨내자 이내 동이 터온다. 청보리밭 위로 물드는 태양의 행보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이른 아침 해 뜨는 마을 진산리에서 맞는 해는 바로 내일의 희망을 가져다주는 황금마차처럼 보인다.


찬란한 태양이 중천에 걸리고 나서야 진도아리랑의 여음은 잠시 허공을 맴돌다 바다로 스며들어가 숨는다. 하지만 이내 그 여음은 달그락 대며 갯돌 구르는 소리로 변한다. 수국 빛 바다에 유영하는 진도아리랑, 대금산조, 돌담길, 바람소리, 유채꽃, 그리고 여인네의 손길들이 여전히 돌담길 사이를 따라 흐르고 있다.


멀리 보적산과 범바위가 보인다. 오른쪽은, 당리 언덕에서 바라본 도락리 마을


이전 12화 돌담길 따라 흐르는 진도아리랑의 여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