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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04. 2018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의 행복


1. 해우소를 찾아가는 여행



동백꽃 피는 해우소 / 김태정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 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달마산 아래 미황사 대웅보전과 명부전, 그리고 응진당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달마산, 그 아래 해가 질 때면 황금빛으로 물든다는 미황사가 있다. 김태정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그녀가 인도하는 미황사로 들어서게 된다. 그녀가 알려준 동백꽃 피는 해우소에 버티고 앉아 쪽창만 한 바깥세상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큰 안경을 써야만 세상이 큰 것은 아닐 테고 작은 안경을 쓴다고 세상이 작게 보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 크던 작던 그 어느 안경을 쓰던 세상은 언제나 저 홀로 그대로 같지 않은가.


동백꽃 피는 해우소에서 그 작고 예쁜 행복을 느껴보고 싶어서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미황사 해우소를 찾아 나섰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미황사를 찾아갔던 거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미황사 해우소에서 김태정 시인이 말한 작은 행복들을 맛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해우소를 찾았다.


드디어 해우소를 찾아가는 희한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남도로 향했다. 계절을 알리는 남도의 빛은 순하디 순한 봄빛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어쩌면 미황사 해우소에서 찾으려 한 그 행복의 전조라고나 할까?


미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주차장에서 미황사에 이르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새소리에 손장단을 맞추고 길가에 떨어진 동백꽃을 세면서 길을 돌아 오르면 어느새 미황사에 이르게 된다. 어디선가 울어대는 휘파람새, 박새, 곤즐박이들의 경쾌한 노랫소리. 땅에 내려앉은 동백꽃과 나무에 돋아난 연초록의 여린 잎들은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코끝에 스치는 숲의 봄내음. 살갗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 모두가 싱그런 봄이다.


미황사에 닿자마자 제일 먼저 고대하던 해우소를 찾았다. 볼일을 보는 척 해우소로 들어간다. 아,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해우소안에서 밖을 내다볼 요량으로 아랫도리를 까고 앉아보지만 밖을 볼 수 있는 작은 창이 보이지를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대충 볼일을 보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어쩌면 김태정 시인이 말한 해우소가 깊이를 가름할 수 없는 그런 해우소가 있을 때 시를 쓴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 쪽창이 없는 게 아닐까?


아무튼 미황사에 도착해 제일 먼저 보이는 해우소에서 너무 성급하게 김태정 시인의 말을 곧이 곧대로 증명해 보려고 한 게 잘못이었나 보다. 가만 보니 어쩌면 이 해우소가 아니라 다른 곳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가만 해우소 쪽창은 없지만 혹여 해우소 입구에서 보이는 풍광을 헤아리며 조그만 텃밭과 애기동백꽃이 피어있음 직한 나무를 찾기 위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미황사로 가는 길은 온통 동백나무 숲이다.
미황사 초입에 있는 해우소에서



해우소에서 가까운 곳에 다소곳이 서있는 동백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그 곁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빨강 제라늄이 피어있는 화분이 하나 보인다. 아마 저기쯤 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에 자꾸만 눈이 간다. 해우소 쪽창 너머 애기동백나무가 있는 곳이 저곳이 맞을듯한데 도무지 맞는 건지 가늠이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사찰 초입에 있는 해우소 맞은편도 온통 동백나무 숲이다. 미황사 동백은 올해 3월 중순이 되어야 만개할 듯싶다.) 


애기동백을 찾는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늙은 동백나무는 발그레한 꽃 한 송이를 매달고 반기고 있다. 진한 동백의 붉은빛이 너무 농염하다. 어두운 밤에 만난다면 저 붉은빛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미황사 입구에 있는 해우소에서의 해프닝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아예 미황사 대법당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본다. 그곳에는 어쩌면 찾으려는 해우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분명 스님들이 이곳까지 내려와 볼일을 보지 않고 법당 근처 어딘가에서 볼일을 볼 테니 말이다.


대법당이 있는 위쪽으로 올라서는 순간 대웅전의 모습보다 오히려 그 뒤켠에 조용히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달마산이 눈에 들어온다. 달마산은 해남에서 땅끝마을을 내려가는 도로변을 따라 동편 하늘을 가리며 암릉과 기봉으로 솟아 올라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 산 동백숲에 몸을 가린 절집 미황사가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이다.


달마산을 등지고 쏟아지는 봄볕 속에 포근히 자리 잡은 절집은 너무나 평화롭다. 세속의 번뇌를 벗어난 미타찰의 세계에 든 듯 저절로 마음이 푸근해진다. 『신 증 동국여지승람』에 “달마산은 달마대사의 법신이 늘 상주하는 곳”이라고 했다. 야트막한 구릉을 이루고 밋밋하게 기어오르던 산비알은 끝자락에 가서야 급경사로 치받으며 다시 암릉의 벼랑을 드리우고 기암과 기봉으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올라 절집 뒷자락을 병풍처럼 둘러싸며 선경을 펼쳐준다.


볼수록 멋진 풍경이다.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는다. 절집과 어우러진 달마산의 신비로운 경관, 어디에 이런 풍광이 또 있을까 싶다. 더구나 산자락은 군락을 이룬 오래된 동백나무들이 절집을 휘감듯 감싸 안고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달마산 산정에 솟아오른 기암괴석들 역시 오백나한 불제자의 모습으로, 혹은 불도량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기상으로 호위하듯 둘러서 있다.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불도량의 기품이 그야말로 예사롭지가 않다.


미황사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중
대웅보전 뒤편 웅진당으로 오르는 중




2.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의조화상이 창건한 미황사는 1751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지만 오랜 세월 건물 외부 단청이 모두 지워지고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소박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굳이 화려한 단청을 덧칠하지 않은 그냥 그대로의 대웅보전이 더 좋게 느껴진다. 대웅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문살 문양들 역시 빛바랜 나뭇결이 곱게 느껴진다. 채색하지 않은 문양들이 미황사의 멋을 더해준다.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보전은 꾸밈없는 남도의 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 바로 이거로구나, 남도의 빛이 바로 여기에 머물러 미황사를 낳았구나 하는 생각에 여러 시인들이 그리도 남도의 빛을 노래한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진도 앞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이 미황사의 빛바랜 벽들을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해 질 녘이면 미황사는 표현 불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펼쳐준다고 하지 않던가.



미황사 / 김태정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모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불생불멸……불생불멸……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오리, 다람쥐, 게, 물고기 등 문양을 조각한 대웅전 주춧돌들



그래서 대웅전을 ‘황금법당’이라 했던가 보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대웅전의 대들보와 벽면에 그려진 천 분의 부처님이 응답하여 나오신다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렷다. 문득 미황사(美黃寺)란 이름이 매우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미황사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쓴 사적기(숙종 18년, 1692년)에는 미황사의 창건설화를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경덕왕 8년(749) 돌배(石船) 한 척이 사자포(땅끝마을) 앞바다에 나타났다. 며칠 동안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기를 반복하였다. 이에 의조(義照) 화상이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하자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함(金函)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법화경과 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 등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검은 바위가 깨지면서 검은 소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에 금인이 나타나 "나는 우전국(인도)의 왕이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의조화상이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한참을 가다가 다시 넘어지더니 소는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세웠다고 한다.


미황사의 ‘미(美)’는 소 울음소리가 아름다워서 붙인 것이고, ‘황(黃)’은 금인의 아름다운 황금색에서 따왔다고 한다. 결국 “미”하니 “황”하고 아름다운 빛이 번쩍였다는 것이겠다. 그 아름다운 빛은 결국 여기 남아 미황사를 낳고 주변 달마산 동백숲을 붉게 물들인 게 아닐는지.


한편, 달마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황사를 품고 있는 이 산은 달마대사와 인연이 많을 듯하다. 선(禪)을 주로 하는 동아시아의 불교에서 달마는 조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이곳 달마산 외에는 지명에서 달마대사의 체위가 남아있는 곳은 없다고 한다.


흔히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말을 하는데 달마대사가 깨달음을 얻고 선을 전파한 후 종적이 묘연해진 것은 어쩌면 달마대사가 동쪽(우리나라)으로 와 이곳 달마산에 안거 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래서인지 달마산의 산세와 능선이 늘어진 선을 보면 달마대사의 이마와 눈매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득 대웅보전 뒤로 흐르는 달마산 능선의 흘러감이 예사롭지가 않다. 자꾸만 그 흐름에 눈이 간다.


그 병풍 같은 산아래 대웅보전을 짓고 그 옆에 명부전을 두었다. 부처님의 자비를 바로 곁에 전하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곳인데, 염라대왕이 있는 저승에 당도했을 때 죽은 자의 죄를 가볍게 처리하도록 변호해 주는 일을 전담하는 이가 바로 지장보살이다.


명부전을 지나 스님들 공부방으로 오르는 길에 작은 개천이 흐른다. 그곳에는 흡사 스님들이 욕망을 벗어놓은 듯 개천은 온통 동백으로 가득하다. 동백꽃이 너무 붉어 눈이 부실 지경이다. 도대체 스님들은 어찌 저리도 붉은 정념을 잘도 견디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번에는 대웅보전 뒤쪽에 고요히 기도하고 있는 법당 응진당으로 올라간다. 보수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단청을 참 곱게도 발랐다. 응진당(應眞堂) 마당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이 응진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이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 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고 하는데 그 모습을 아무 때나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번에는 근처 삼성각으로 발길을 돌린다. 삼성각 앞 석탑에는 빼곡하게 들어찬 돌조각들이 보인다. 저 많은 염원과 기도의 편린들인 돌조각들이 부처님 만큼이나 경건해 보인다. 근처에는 불도를 닦는 스님들 공부방도 있다. 아마 지금도 저곳에서는 묵언의 매질이 계속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응진전 앞마당 한편 숲 속에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불상 하나 가 놓여있다. 후광을 장식한 돌조각이 떨어져 나간 게 공연히 안쓰럽기만 하다.


'달마고도'에 올라 바라본 미황사 경내
달마산 능선길을 금강스님이 달마고도라 이름 짓고 길을 정비했다.
달마산 정상, 달마봉에서 바라보는 남해
달마산 정상에서 진도쪽 바다를 보면 '청산도 거북'을 닮은 섬이 "궁고치는 미황사 스님들"을 기리는듯 떠있다




3. 미황사의 비밀


그사이 드디어 미황사 대웅보전 부근의 다른 해우소를 찾았는데 역시 쪽창이 달린 해우소가 아니라 현대식 돌집으로 개조를 한 곳이다. 실망감이 엄습해 온다. 그 안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이르는 검은 돌만 둘러쳐진 곳이기 때문이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무서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제 미황사에서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의 행복"을 맛보기는 글렀나 보다. 어쩌면 김태정 시인이 동백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린 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동백나무 그늘에 앉아 가만가만 동백나무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미황사의 비밀을 알아내었을지 모를 일이다. 동백나무들이야말로 오랜 시간 미황사와 함께 했으니 그 궁금증을 해결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 김태정


목탁 소리 도량석을 도는 새벽녘이면

일찍 깬 꿈에 망연하였습니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아침엔

고무신 꿰고 황토 밟으며

부도밭 가는 길이 좋았지요

돌거북 소보록한 이끼에도 염주알처럼

찬 이슬 글썽글썽 맺혔더랬습니다.

저물녘이면 응진전 돌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어둠 내린 섬들은

마치 종잇장 같고 그림자 같아

영판 믿을 수 없어 나는 문득 서러워졌는데

그런 밤이면 하릴없이 누워

천장에 붙은 무당벌레의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서른여덟은 쓸쓸한 숫자

이미 상처를 알아버린 숫자

그러나 무당벌레들은 태아적처럼

담담히 또 고요하였습니다.

어쩌다 밤오줌 마려우면

천진불 주무시는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인 듯 사뿐, 지나곤 하였습니다.

달빛만 골라 딛는 흰 고무신이 유난히도 눈부셨지요

달빛은 내 늑골 깊이 감춘 슬픔을

갈피갈피 들춰보고, 그럴 때마다 나는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오줌을 누었습니다.

눈앞에 해우소를 두고서 부끄럼성 없이

부처님께 삼배를 드릴 때처럼 다소곳이

무릎을 꾸부리고 마음을 내릴 때

흙은 선잠 깬 아이처럼 잠시 칭엉거릴 뿐

세상은 다시 달빛 속에 고요로워 한 시절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었습니다

영영 나가지 말았으면 싶었습니다



달마산 산자락의 불도량,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집 미황사의 해우소를 벗어나며 해 질 녘 진도 앞바다를 물들이며 미황사로 물결쳐올 황금빛 낙조를 머리에 그려본다. “미”하니 “황”한 절집의 해우소. 미황사의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진도 앞바다 낙조를 다시 보러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가슴 찡한 미황사 해우소의 기억을 간직한 채 떠나야만 했다. 그녀가 동백나무 그늘 속에 깃들고 싶어 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아름다운 절집 미황사(美黃寺)가 있는 해남 땅끝마을을 노래한 김지하의 ‘애린’이 다시금 되새김하듯 새록새록 떠오른다.



애린 / 김지하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해우소의 행복을 찾으려 한 바보 같은 나는 이제사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의 행복”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임을 깨닫게 되었다.


땅끝마을 사자봉에 저녁노을이 질때




* 김태정 시인, 그녀는 서울서 태어나 자랐다. 그녀는 어느 날 서울을 떠나 땅끝 해남으로 내려와 ‘달마의 뒤란’ 미황사 자락에서 10년을 살다 나이 마흔여덟에 암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단지 한 권의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남겼을 뿐이다. 그녀가 해우소 맞은편 동백나무 숲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어쩌면 미황사 경내 어딘가에서 고운 아기동백이 되었을 게다. 그러니 미황사에 가거들랑 고운 아기동백을 꼭 찾아 만나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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