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I
"누군가 특정의 작품을 말할 때 우리는 거의 동시에 그 작품을 그린 화가를 생각한다. 미술 작품을 보는 것은 그래서 한 인간을 만나는 일이고 그 작품은 작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작품의 구도나 색채, 내용 등 모든 것이 작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델프트, 프랑스와 영국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던 1672년 이전까지 부유했던 도시, 더구나 1602년 네덜란드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네덜란드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한다. 네덜란드가 80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독립을 이루고 드디어 해상패권을 잡으며 세계무역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바로 이 시기에 델프트에서 태어난다. 네덜란드 황금기에 1632년 10월 31일에 태어난 페르메이르, 그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델프트 시내 광장에 인접한 볼더스흐라흐트 25번지가 가장 유력하게 추정하고 있다.
* 첫 번째 사진 맨 아래 왼쪽이 '성 루카 길드' 건물이고, 아래 중앙 두 개의 흰색 창이 있는 집이 바로 두 번째 사진의 집, 1층은 카페, 2층은 펜션으로 영업 중. 세 번째 사진은 페르메이르가 태어난 집(25번지) 약도
그런데 페르메이르처럼 훌륭한 화가가 왜 2세기 동안이나 알려지지 않았고, 더욱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인지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그 궁금증은 1989년 경제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존 마이클 몬티아스가 페르메이르의 고향인 델프트의 문서 보관소에서 그에 관한 문서를 한 무더기 찾아내면서 풀린다. 문서에는 페르메이르가 어떤 집에서 살았고, 친구들은 누구이고, 자식들 이름은 무엇이며, 언제 처갓집으로 이사했고, 사후에 남긴 물건들은 무엇인지 등 그의 사생활에 대한 매우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페르메이르가 죽은 뒤 약 200여 여 년이 흐르고 난 후,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장르화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재조명된다. 그렇게 뒤늦게 페르메이르가 인정받으며 점차 세계적인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페르메이르가 동시대에 인정받지 못한 작가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매우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던 당대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점점 페르메이르에 대한 평가는 더 많은 연구를 통해 새롭게 알려지게 된다. 그렇게 몬티아스의 연구 이후 페르메이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매우 신비로운 작가’에서 ‘일생이 잘 알려진 화가’로 자리 잡게 된다.
페르메이르의 아버지 레이니어 얀츠는 델프트 볼데스흐라흐트(현재 델프트 신교회 인근에 위치한 ‘House of Vermeer’라는 기념품가게)에 있는 방을 빌려 "나는 여우"라는 이름의 여관을 개업한다. 볼데스흐라흐트의 여관은 그 후 1637년에 두 번째 임대계약을 체결한다.
한편 1637년 문서에 따르면, 페르메이르의 부모는 당시 볼데스흐라흐트에 있는 피터 코르스티엔손 호프루스에게서 집을 빌린다. 실제로 1620년에서 1632년 사이에 발행된 ‘세무기록’에는 피터 코르스티엔손이 세인트 루카 길드 하우스 동쪽에 있는 세 번째 집의 소유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 볼데스흐라흐트 25번지와 일치한다. 이곳에서 페르메이르가 태어났음을 밝혀주는 자료이다.
그동안의 조사결과를 종합해 보면, 페르메이르의 아버지 레이니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볼더스흐라흐트에 있는 집(현재 House of Vermeer라는 선물가게)을 빌려 여관을 개업하고, 나중에는 여관과 미술품 판매를 병행하는 사업을 한다. 여관의 이름은 '나는 여우'였다. 이 이름은 그의 이름 레이니어와 성 보스를 뜻하는데, 둘 다 옛이야기 '레이나드 더 폭스(Reynard the Fox)'에서 따온 것이다.
그 후, 1653년 4월 5일, 요하네스 페르메르는 나이 21살이 되었을 때 마리아 틴스(1593년경~1680년)와 레이니어 볼네스의 막내딸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장차 페르메이르의 장모가 될 카타리나 볼네스의 어머니 마리아 틴스는 두 사람의 혼인서약서에 결혼을 인정하는 서명을 거부한다. 하지만 마리아 틴스는 페르메이르가 개신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과 결혼을 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고 그를 사위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두 사람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곳에 ”메헬렌“이라는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1632년 10월에 화가 얀 페르메이르가 태어났다.”는 내용의 문구가 있는 안내판. 그러나 실제 페르메이르가 태어난 곳은 이곳이 아니라 '성 루카 길드'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째 집으로 추정하고 있다. (* 위에 소개한 사진 참조)
카타리나 볼네스, 그녀는 요하네스보다 한 살 어렸다. 이 젊은 부부는 페르메이르가 태어난 볼더스흐라흐트 25번지 집에서 페르메르의 가족과 함께 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카타리나의 어머니 마리아 틴스는 부유한 벽돌공이었던 자신의 남편 레이니어 볼네스와의 결혼 생활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딸의 결혼에 대해 매우 신중한 결정을 하게 된 듯하다.
1653년 4월 20일, 드디어 고대하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21세)와 카타리나 볼네스(20세)가 델프트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스히플루이덴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 마을은 가톨릭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예수회는 이 마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마리아 틴스가 이미 고향인 하우다(Gouda)에서부터 예수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 결혼식을 결정한 것도 마리아 틴스의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리아 틴스의 집은 델프트 아우데 랑엔다이크(Oude Langendijk) 25번지, 예수회의 "숨겨진 교회"에서 두어 집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집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볼네스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페르메이르는 그의 장모 마리아 틴스의 배려로 그의 아내 카타리나와 결혼 후 신혼살림을 차리고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대부분 그린다. 이 그림들이 지금 페르메아르를 빛의 화가, 색채 마술사로 부르게 하고 있다.
페르메이르가 카타리나와 결혼을 함으로써 페르메이르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높아지게 된다. 더욱이 페르메이르가 장모 마리아 틴스와 함께 한 집에서 살게 되면서 마리아 틴스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적지 않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듯하다.
페르메이르가 결혼을 한 그해 12월 29일, 25세 성인이 되어야 가입할 수 있는 성 루카 길드에 회원으로 등록한다.(당시 네덜란드는 25세가 되어야 성인으로 인정을 했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결혼을 함으로써 성인으로 인정을 해준 듯하다.
한편, 페르메이르는 다른 모든 길드 소속 예술가들처럼 6년간의 도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가 도제를 어떻게 마쳤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당시 길드회원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미술거래상을 하면서 배운 지식을 아들인 페르메이르에게 화가들과 미술 작품에 대한 지식을 전수해 줌으로써 도제교육과정을 인정해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함께 아직 수입이 없는 페르메아르가 길드 입회비 6 길더를 내야 했는데 돈이 없어 1.5 길더만 납부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준다. 또한 길드 조합원으로서 열심인 그에게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기인 1660년대와 70년대에 연이어 4번이나 길드의 수장으로 일을 하게 된다.
페르메이르와 카타리나 볼네스는 1653년 결혼하기 전, 한동안 연애 기간을 가졌다. 그런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21세에 결혼을 함으로써 당시 일반적으로 남성의 첫 결혼 연령이 25세에서 30세 사이였던 것에 비해 다소 이른 결혼을 한다. 1653년 4월 5일 자 문서에는 카타리나 볼네스의 어머니인 마리아 틴스가 결혼에 반대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대해 화가 *레오나르드 브라머(Leonaert Bramer: 1596–1674)가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마리아 틴스에게 페르메이르의 결혼에 동의해 주도록 중재를 시도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젊은이들이 일반적으로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강제로 정략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부모들이 미래의 배우자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을 테지만 마리아 틴스는 아마도 페르메이르가 너무 어리고, 경제적으로 아직 가장으로서 적절한 수입을 가져올 만큼 자립하지 못했고,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와 같은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20일, 두 사람은 로마 가톨릭식으로 결혼식을 스키플루이덴 마을에서 거행한다. 그리고 카타리나가 페르메이르와 함께 레니어 얀츠가 운영하는 여관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실은 카타리나가 아마도 4월 20일 이전에 이미 집을 떠나 시장 광장에 있는 페르메이르가 태어난 집(볼더스흐라흐트 25번지)에서 페르메이르와 동거를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장모 마리아 틴스는 그녀의 딸 카타리나의 법적 성인 연령을 고려했을 때, 결혼을 금지하거나 반대할 어떠한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다행히 페르메이르와 장모 마리아 틴스 사이에도 별다른 불화가 전혀 없었다. 그 후 1660년 경이나 그 이전에 페르메이르 부부는 아우데 랑엔다이크에 있는 장모 마리아 틴스의 넓은 집으로 들어가 장모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법적으로는 1661년 마리아 틴스가 자신의 고향인 하우다(Gouda) 마을에 머물면서 결혼을 승인함으로써 향후 유산 상속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정리해 처리한다.
페르메이르는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성인으로 간주되는 법적 연령은 일반적으로 25세였지만, 결혼하면 즉시 성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20세라는 어린 나이에 페르메이르는 그의 어머니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고, 결혼을 통해 법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되어(법적으로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활동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미술 사업을 합법적으로 이어받아 운영하며 자립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된다.
(* 1580년 네덜란드의 결혼법은 남자가 23세 미만이거나 여자가 20세 미만일 경우 부모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했다.)
17세기 델프트의 25번지 이곳에는 예수회가 다락방(주황색)에 비밀교회로 사용하는 세 채의 집이 있었다. 장모 마리아 틴스는 페르메이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그녀의 딸과 결혼을 하자 예수회(그림 속 파란색 부분) 옆집에 살던 그녀와 함께 같은 집에서 살게 한다. 페르메이르는 이곳에서 15명의 자녀를 낳고, 아이들은 그가 살던 옆집 가톨릭 수도회 비밀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한다.(* 당시 개신교 운동이 광풍처럼 진행되었기에 은밀한 예배를 진행했을 것이다.)
- 첫 번째 사진 속 갈색 부분이 마리아 틴스의 집, 이곳에서 페르메이르 부부가 거주하고 스튜디오를 꾸렸다.
우측 갈색 부분과 붙은 푸른색 부분이 가톨릭 수도회 공간
- 두 번째 사진 성당 오른편(흰색 창문 보이는 부분)이 마리아 틴스의 거주 공간
- 세 번째 사진은 마리아 틴스의 집 해부도
○ 15명의 아이들
1. 마리아(Maria) : 출생: 1654년 1월~3월, 사망: 1713년 이후
2. ? : 1656년/ 출생 후 사망일 불확실
3. 엘리자베스(Elisabeth) : 출생: 1657년 여름, 사망: 1713년 이전
4. 코르넬리아(Cornelia) : 출생: 1659년 초반, 사망: ?
5. 알레이디스(Aleydis) : 출생: 1660년, 사망: 1749년
6. 베아트릭스(Beatrix) : 출생: 1661년, 사망: ?
7. 요하네스(Johannes) : 출생: 1663년 4월~5월, 사망: ?
8. 거트루이드(Gertruyd) : 출생: 1664년 4월~5월, 사망: 1713년 이후
9. 프란시스쿠스(Franciscus) : 출생: 1665년 4월~5월, 사망: 1708년 이후
10. ? (사산) : 1667년 7월 10일
11. ? : 1668년/ 출생 후 사망일 불확실
12. 카타리나(Catharina) : 출생: 1669년, 사망: 1713년 이후
13. 이그나티우스(Ignatius) : 출생: 1672년 4월, 1713년 이후
14. ? (사산) : 1673년 6월 26일
15. ? : 출생: 1674년 8월, 사망: 1678년
그러나 페르메이르의 자녀 15명 중 4명은 세례를 받기 전 사망을 하고 만다. 더구나 페르메이르의 11명 자녀 중 8명이 그가 살아 있던 시기에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당시 미성년자는 25세 미만을 의미했다.) 아이들을 위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빚을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메이르는 1675년 12월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페르메이르 사망 당시 나이가 겨우 43살,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전해져 내려오는 작품도 겨우 37점으로 그 규모가 아주 적다.
페르메이르 사망기록에 따르면, 1675년 델프트에서 사망하고 12월 15일 매장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죽음 후, 아내 카타리나도 어려운 가정생활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산한다. 결국 페르메이르가 죽은 지 12년이 지난 1687년 카타리나의 나이 56세에 그녀도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페르메이르 사후 첫째 딸인 마리아가 아버지처럼 그림을 팔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문에 현재 페르메이르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것 중 일부는 사실 그녀가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따른다. 한편, 마리아 틴스(카타리나의 어머니)는 87세까지 살았고, 페르메이르의 아내 카타리나는 열한 명의 자녀와 연로한 어머니를 돌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을 것이다. 페르메이르가 사망한 후, 그녀는 살림과 아이들 외에는 다른 일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업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페르메이르는 그의 자녀들에 대한 애정으로 그의 작품 속에 아이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그림 속 아이들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37점의 작품 중 아이들을 직접 묘사한 것은 두 번뿐이다. 한 번은 <골목풍경>이고 두 번째는 <델프트 풍경>이다. 이 그림에서 어린 소녀가 그림 맨 왼쪽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페르메이르의 <골목풍경> 작품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묘사된 부분 중 놀이에 열중하는 두 아이들을 볼 수 있다. 비록 캔버스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림의 분위기에 없어서는 안 될 따스함을 더한다. 페르메이르 특유의 신비로운 스타일에 충실하게, 그는 두 아이의 얼굴과 놀이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가린다.
옷차림으로 보아,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어두운 색조의 옷을 입은 아이는 남자아이이고, 뚜렷하게 여성스러운 옷을 입은 아이는 여자아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페르메이르는 두 아이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신의 행동을 숨기도록 함으로써, 관객이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 속으로 깊이 빠져들도록 유도한다. 이 탁월한 기법은 관객이 단순한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작품 속 고요한 서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공동 창작자가 되도록 한다.
페르메이르에게는 마리아, 엘리자베스, 코르넬리아, 알레이디스, 베아트릭스, 요하네스, 게르트루이, 프란치스코, 카타리나,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이 한 명, 이렇게 열한 명의 자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 그림의 애절함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페르메이르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그가 자주 보여주는 그림 속 벽면에 걸린 그림인 ‘큐피드’ 같은 것을 통해서, 또는 다른 작품들에서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등장하는 아이들을 매우 추상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다. 그 예로 <우유 따르는 여인>이나 <버지널 앞에 선 여인>과 <버지널 앞에 앉은 여인>의 띠벽지처럼 타일 바닥재에 아이들이 매우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페르메이르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은 사실 유아세례를 받지도 못했거나 유년기에 사망한 네 명의 아이들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나머지 페르메이르의 자녀들은 모두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아이들 이름은 카타리나의 가톨릭 가문, 특히 장모 마리아 틴스와 여러 가톨릭 성인들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식으로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첫째 딸 이름은 마리아였는데, 아마도 마리아 틴스와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이들의 작명 방식과 자녀들이 가톨릭 신앙으로 양육되었다는 사실은 페르메이르가 단순히 가톨릭 가정으로 장가를 든 것이 아니라 자신도 철저히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예수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중 한 명은 나중에 가톨릭 사제가 된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페르메이르가 단순히 카타리나와 결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만 가톨릭 신앙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에 깊이 뿌리내린 가정을 꾸리고 페르메이르의 생활과 신념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2015년 11월 20일,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국립미술관에서 페르메이르의 <골목 풍경> 작품을 주제로 작지만 멋진 전시가 열린다. 이 전시는 델프트에 있었던 페르메이르가 살던 집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낸 프란스 그리첸하우트 교수가 그동안 수행한 연구 결과와 증거를 보여준다. 그 열쇠는 100년 동안 전문가들이 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허사였던 수수께끼를 해결한 것이다.
그리첸하우트 교수는 델프트 기록보관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세금 목록, 즉 세금 원장(Legger van het Diepen der Wateren)을 찾아낸다. 이 세금원장을 통해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시 델프트 운하 주변에 사는 모든 주민은 집의 넓이에 따라 세금을 내야 했다. 이 세금 덕분에 운하의 적절한 유지 관리와 준설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납세자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따라서 이 세금원장의 존재가 당시 페르메이르가 살던 집과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게 한 것이다.
페르메이르의 그림 <골목 풍경>은 매우 이례적인 도시 개발을 보여주는데, 두 개의 골목길(문)이 '리듬'을 따라 있다. 페르메이르가 묘사한 이 집은 많은 균열과 석조의 열악한 상태로 보아 1500년 직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1536년 5월 3일의 대화재에서도 살아남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첸하우트 교수는 마침내 블라밍슈트라트(좁은 운하)의 40번지와 42번지에서 그 독특한 리듬을 발견했고, 프리젠호프 박물관(Prinsenhof Museum)에 보관 중이던 1536년 대화재 당시의 피해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찾아내 사진 속 그 지점을 대조해 대화재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이 42번지라는 것을 찾아낸다.
1) 1536년 델프트 대화재 당시 피해 상황을 표시한 지도(위쪽에 신교회가 보이고 중앙 운하를 기점으로 아래쪽 짙은 갈색 표시지역이 화재를 입은 지역임(참고: 현재 운하 물길과 다소 다르다.)
2) 가운데 부분이 페르메이르가 살던 건축물인데 훗날 가톨릭 교회를 설립하면서 페르메이르가 살던 곳은 기도소로 활용된다.
3) 블라밍슈트라트 42번지가 현재의 페르메이르 거주지(⑦페르메이르 거주지)와 일치함
* ①신교회, ③시청, ⑤성 루카 길드, ⑥페르메이르 생가, ⑦페르메이르 거주지, ⑧델프트 화약창고
첫 번째 지도에 보면, 위쪽에는 마켓 광장에 있는 신교회의 중앙 탑이 보인다. 중앙 바로 아래 오른쪽에는 다리 건너편 비스듬한 곳에 블라밍스트라트 운하 42번지라는 별채 건물이 있다. 사진 속 밝은 갈색과 회색 부분은 불에 탄 부분을 나타낸다.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집들은 화재 당시 상태를 보여준다.
두 번째 사진의 위층 앞방이 페르메이르의 작업실이다. 이곳에는 "스페인 의자 2개와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 1개, 화가용 이젤 3개, 팔레트 6개, 패널 6개, 화가용 캔버스 10개, 높은 독서용 책상, 그리고 몇 가지 이런저런 물건들이 있다. 또한 테이블 상판이 있는 오크 테이블과 서랍이 달린 나무 수납장도 있다.
이 물건들은 페이메이르의 그림 속 소품으로 자주 등장한 것들인데, 1676년 2월 29일, 델프트 공증인 J. 반 빈의 보좌관이 몰렌포르트 모퉁이에 있는 현재 주소 아우데 랑엔다이크(Oude Langendijk)에 위치한 틴스/ 페르메이르(Thins/ Vermeer)의 집에서 작성한 페르메이르 목록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1675년 12월 말 이 작업실에서 사망했다.
* 피터 얀센 엘링가가 1670년경에 그린 실내 그림은 집의 위층 앞방을 보여준다. 바닥은 세라믹 타일로 되어 있고 창문 두 개가 있다. 입구는 오른쪽에 있다. 페르메이르의 집에서는 작업실과 계단의 위치가 다르다. 페르메이르의 작업실은 그리 크지 않다. 천장 들보는 가로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문 쪽에서 안쪽으로 뻗어 있다.(* 작업실 구조를 알 수 있는 페르메이르의 그림 <Allegory of the Faith: 가톨릭신앙의 우화, 1672-74> 참조)
* 신 교회가 있는 곳에서 1분 거리에 있는 곳에 가톨릭 성당이 하나 있다. 그 교회 모퉁이에 부속 건물처럼 보이는 건물이 바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가 1653년부터 카타리나 볼네스와 함께 22년간 살림을 하던 곳이다. 페르메이르는 거리를 마주 보고 있는 이곳 2층 스튜디오에서 멋진 빛과 색으로 페르메이르 특유의 도시 풍경과 아름다운 여인들 모습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