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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 X 50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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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태원 Taewon Suh Apr 11. 2020

흑가백가론 (黑歌白歌論)

검은 거리의 흰 남자, 대릴 홀

미국에서의 20세기 후반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던 시대입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은 학교와 식당 등 공공시설에서 흑백을 구분했었습니다. 많은 베이비부머들이 공식적인 혹은 공공연한 인종차별을 경험했다는 것이지요. 음악계도 동일한 역사를 갖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백인은 백인의 음악을, 흑인은 흑인의 음악을 듣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 글에서 백인과 흑인이라는 이상적이지 못한 표현을 자주 쓰게 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1960년대까지 어떤 백인 가수들은 이름 없는 흑인 아티스트의 곡들을 리바이벌해서 히트시키고 대부분의 수익을 가져가곤 했습니다. Blue-eyed soul이란 명칭도 사실은 인종주의적입니다. 백인들은 흑인음악도 백인이 부르는 것을 선호한 데서 나오게 된, 사실 인종차별적인 명칭입니다. Righteous Brothers를 좋아했다는 흑인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만...


1946년에 태어난 Daryl Hall은 아직 인종차별이 정상이던 시절에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어린 대릴 홀은 자전거를 타고 흑인들이 사는 구역에 가서 놀기를 좋아하는 괴짜였습니다. 10대 후반 이미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었던 그는 템플대의 동기들과 함께 The Temptations를 모방한 The Temptones라는 Doo Wop 밴드를 구성합니다.


이 밴드의 활동을 통해 대릴 홀은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이미 이름을 알리고 있던, 몇 살 위의 Gamble and Huff 그리고 Thom Bell과 같은 아티스트와 같이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Philly Soul 혹은 Philadelphia Sound의 아버지 격으로 추앙받는 흑인 작곡자 및 제작자입니다. 특히, 세 살 위의 Kenneth Gamble은 비슷한 또래이지만 이미 17세부터 프로 작곡자로 일을 시작해 당시에는 이미 필라델피아 음악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제와 활동을 통해 대릴 홀은 자연스럽게 R&D에 기반한 필라델피아의 단단한 음악적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지요.


The Temptones and The Temptations

대릴 홀의 공식 첫 밴드였던 템프톤즈는 이름에 걸맞게 템테이션스의 서포트도 받고 그 멤버들과 어울리기도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템프톤즈의 첫 무대의상이었던 상어 가죽 슈트는 템테이션즈의 Paul Williams가 사줬다는군요. (참고로 폴 윌리암즈는 32살 때 개인적인 문제로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34살 때인 1973년에 자살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대개 인들에게는 욕을 먹고 흑인들에게는 조롱을 받을 수도 있는 처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릴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요인이었지요. 잘나가는 선배가 신인 후배의 옷을 사줄 수도 있지 말입니다.


1967년경의 대릴 홀, The Temptation의 Paul Williams와 함께

템프톤즈는 당시 지역 밴드 경연대회에서 (곧 큰 인기를 얻게 되는) Delfonics에 이어 2등을 차지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습니다. R&B의 팬이라면 La La Means I Love you나 Didn't I Blow Your Mind This TIme 등의 델포닉스의 클래식 넘버를 들어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어쨌든, 템프톤즈의 멤버들이 하얀 얼굴로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야유하던 흑인 청중들은 대릴 홀의 노래를 듣고 야유를 멈추곤 했다는군요. 막판에는 공연장서 만나 친구가 된 존 오츠도 리듬 기타를 담당하는 멤버로 들어오지만, 몇 멤버의 졸업과 더불어 겹친 이유로 템플대 동아리 밴드 템프톤즈는 곧 해체하게 됩니다.


[Good bye] by Temptones (1967)

대릴 홀은 음악과 소울에는 색깔의 구분이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백인의 소울은 흑인의 소울과 다르지 않으며, 소울을 표현하는 데도 흑백이 없다고 말합니다. 21세기의 시점에서 이것은 멋진 말이 되지만,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 말은 상식 밖의 이야기가 됩니다.


흑인 음악을 하는 이 백인 청년은 백인 팬들에게나 흑인 팬들에게나 좀 희한한 부류였습니다. 예컨대, 1973년 발매된 이들의 명곡 [She's Gone]이 인기를 얻은 것은 먼저 R&B 차트에서였습니다. 1974년 흑인 밴드인 Tavares에 의해 동차트 1위를 차지합니다. 이들의 오리지널은 1976년이 되서야 첫 Top 5싱글 Sara Smile의 인기에 힘입어 차트를 역주행하게 됩니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비평가들에게 홀 & 오츠는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소울의 색깔을 구별하지 않는 대릴 홀은 필라델피아의 R&B를 그린위치 빌리지 스타일의 folk music에 담았으며, 그다음 순간 뉴욕의 punk music을 연주했습니다. "과연 너네의 정체는 뭐냐?"는 얘기를 들으며 이들은 그야말로 조상 없는 불상놈이 되었습니다.


Nile Rogers (맨 오른쪽), Daryl Hall, 그리고 INXS, 1983년경

홀 & 오츠 음악의 다양성은 많은 부분 대릴 홀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는 시대의 트렌드에 민감하여 트렌드 각각의 소울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에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70년 대에 그것은 장점이라기보다는 단점으로 인식 되었지요. 그러한 환경에서 대릴은 거의 10년 동안 본인의 진면목을 알아주지 못하는 시장 상황에 조금씩 절망하게 됩니다.


최고의 기대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될 듯 될 듯하다가도 최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시기가 점점 길어집니다. 1975년 Sara Smile로 Top 5에 진입하고, 1976년 Rich Girl로 1위를 거머쥐기도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슈퍼스타덤으로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1977년 발매했던 [A Beauty on a back street] 앨범은 참패였고 이어지는 두 개의 앨범에 대한 시장의 반응도 미적지근했습니다.


1985년 Live Aid 중 티나 터너를 백업하고 있는 대릴 홀

알고 보면 이들은 시장에 무감각했던 것입니다. 소비자는 자신들이 정의할 수 있는 명확한 것을 선호합니다. 그 당시 이들의 음악은 대중에게 명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릴 홀은 시장의 반응에 상관없이 다양하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도 컬트가 아닌 슈퍼 스타덤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장르가 지배하던 1970년대에 당연히 합당한 생각이 아녔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가 찾아옵니다. 대중음악사에서 이 시기를 지칭하는 [The decade of decadence]라는 명칭은 우스꽝스러운 머리의 Flock of Segulls와 같은 electronic music이나 주로 LA를 기반으로 하는 긴 머리의 metal bands을 상징하는 다소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명칭의 의미에는 또 다른 뒷 면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은 표피적이었던 문화 현상에 대한 것이만, 다른 차원에는 당연시되던 정통성이 흔들리고 많은 다른 것들이 서로 섞이기 시작한 시대에 대한 명칭인 것입니다.


1983년 경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은 백인의 록을 보다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슈퍼스타가 됩니다. 이의 반대쪽에는 이미 홀 & 오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그들의 시간을 맞이하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Eddie Kendrick, John Oates, Daryl Hall, and David Ruffin in 1985, Live at the Apollo

1960년대 필라델피아의 특수한 음악 환경을 떼어 놓고서는 대릴 홀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은 인종주의를 초월한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아티스트로 하여금 외적 차이를 구분하지 않게 했던 당시의 어떤 커뮤니티의 분위기에 대한 글입니다. 이 분위기는 다만 음악을 사랑했고 다른 것에는 신경쓰지 않던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서 조성되고 유포되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커뮤니티적인 분위기는 산업화를 통해서 희석되기 마련입니다. 음반사가 그 덩치를 키우게 되면서 음악은 기획되고 사회의 실지적인 내용과 유리되기 시작합니다. 모타운 레코드를 중심으로 하는 흑인 음악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본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Playing with Cee Lo Green, LFDH (2012)

홀 & 오츠는 1990년 중반 이후 대형 음반사와의 계약을 끝내고 이른바 인디음악계의 일원이 됩니다. 상업적인 전성기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바가 대형 음반사의 천편일률적인 상업적 기획 의도와 대개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특히, 1980년대 말에서 1990년 초까지의 Arista와의 계약 기간 중 이들은 음반사의 수장이자 업계 서열 1위였던 Clive Davis와 크게 충돌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업계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것은 통제하려는 매니지먼트와 자유스러운 아티스트 간의 전형적인 대립이었지요. 성과가 좋지 않을 때, 쉽사리 그 이유는 기획에 따르지 않는 아티스트에게 귀인 됩니다.


클라이브 데이비스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얼마후인 20세기의 끝물에 퇴물이었던 산타나를 통해 천오백만 장의 음반 판매량을 얻어내는 기염을 통합니다. 그는 정말이지 20세기를 대표하는 대단한 기획자였습니다. 다만 그가 했던 모든 것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였겠지요. 다양한 차원의 잣대를 감안한다면, 어떤 인물 역시 다양한 평가를 얻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됩니다.  


한편, 홀 & 오츠에게는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여러 행운이 겹칩니다. 인디음악계가 크게 발흥하고 하이브리드는 대중음악의 주요 스타일이 됩니다. 새로운 세대가 세대를 뛰어넘어 부모 세대가 즐기던 이들의 음악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커뮤니티적 뿌리를 잊지 않았고 그 커뮤니티가 전달해준 가치를 버리지 않았던 대릴 홀은 한 사이클이 돌아 그 가치가 다시 떠올랐을 때, 다시 좋은 시절을 맞게 된 것입다. 50년을 버틴다면 그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테지요.


소울을 표현하는 것에 피부색의 차이가 있을리 없습니다. 대릴 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울 싱어이자 존 오츠와 함께 장르를 극복한 아티스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반세기 동안의 음악적 여정 속에서 그의 뿌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뿌리는 그의 피부색 혹은 어떠한 사회적 이념이 아니라, 음악을 즐기는 데 있어서 어떠한 차별없었던 1960년대 필라델피아의 뒷골목, 그 커뮤니티에 있습니다.



*Title Image: Daryl Hall, 타이틀은 덩샤오핑의 "흑백묘론"의 비유적인 차용입니다.


Do what you do be what you are, Live in 1995

Do what you do be what you are, Live in 1977

Do what you do be what you are, Live in 2014, ft. Johnnysw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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