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을 향한 여정의 첫걸음

Know thyself

by 서태원 Taewon Suh

사람이 프로이트적 자아에서 힘을 얻게 되는 상황은, 클래스에 따라 사실 별 차이가 없는, 편재된 현상일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개체 보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의와 교양 그리고 도덕은 가장 외면의 층을 위한 논리이고 제도입니다. 우리는 예의 있고 교양이 넘치며 도덕적인 행동과 표현을 선호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가끔 세상에 속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경우 이러한 외층과 심층의 유리로 인한 불일치 때문일 것입니다. 예의 있고 교양 있으며 도덕적인 (혹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사실 매우 이기적일 수 있으며, 그 긍정적인 외면의 행동들도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꾸며진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일치를 경험하게 되면 미묘한 배신감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항상 탐욕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요구를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이 더 순수하고 솔직한 셈이지요.


우리는 대개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합니다. 모든 소자아는 자체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 영광에 대한 욕구는 생각보다 거대합니다. 따라서 작은 손실에도 자아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 근거한 어떠한 충고 조차도 그것이 자아의 부정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놀랍게도 매우 적습니다. 자신의 영광에 해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대개의 사람에게 그러한 자아는 소우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속입니다. 아니, 외층에만 집중하고 남의 이목에 집중하는 우리의 지각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고고해 보이는 사람이 난잡한 사생활을 해왔음을 알게 됩니다. 인류애를 근간으로 하는 일을 하는, 고귀해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이용해 온 것이 드러납니다. 가끔 이러한 뉴스는 우리의 단순한 지각 체계를 혼동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외면 만을 인식하고 내층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사기꾼은 달리 사기꾼이 아닙니다. 뛰어난 사기꾼은 인간의 제한되고 완전치 못한 지각 체계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참된 것을 나쁘게 생각하게 하고 참되지 못한 것을 좋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기꾼의 기질이 있는 사람은 종종 현실을 왜곡하고 현실을 자신의 이익대로 재창조해냅니다.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도 사기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과 지각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드물지 않게 근거 없이 남을 비방하고 욕하고 꾸며진 허위를 얘기합니다. 그 대상에 대해 조금만 삐져도 말이지요.


소량의 소극적인 감정마저도 악마적인 힘을 갖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주로 질투와 이기적인 야망에 기인한 "고 사소한" 감정들입니다. 이것은 흔하고 일상적이지만 우리의 에너지를 쉽게 소진합니다. 우리가 사소한 감정에 연연하는 것은 우리가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논의들은 자아[ego]에 대한 프로이트 계파 이론의 설명력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또 다른 반복이었습니다. 이 설명은 통계적으로 상당히 유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통계는 발전과 변화 혹은 전환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매우 강한 팀]은 통계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그리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전환적인 상태에 대한 논의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자아[ego] 개념 대신에 자기[self]의 개념을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Carl Jung처럼 말이지요. 자기는 육체 중심의 메커니즘을 넘어서 원형적이고 무의식적이며 탈개체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얘기해서, 우리는 육체의 보존에 집착하는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의 메커니즘을 벗어나 보다 광활한 우주의 자유를 얻게 되길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소자아의 우물에 갇혀 미처 몰랐던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목적을, 참된 자기의 회복을 통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뛰어난 디자인에는 목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자아 밖에 숨겨 있는 그 목적을 찾고 그것을 향해 우리의 삶을 항해합니다. 좁쌀만 한 우리의 감정과 기상청과 같은 우리의 인식 능력에 속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입니다. 어려운 작업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사실, 그 목표 자체가 사회적이기에 개인적인 차원의 어떠한 목표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부심[pride]은 나쁜 단어가 아닙니다. 다만 소자아로부터의 자부심은 우주의 독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선이 되지 못합니다. 어떠한 외피로 그것을 치장해도 중심이 그렇다면 그것은 독이 됩니다.


[매우 강한 팀]의 자부심은 소자아의 밖에 있습니다. 개인적인 영광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사회적인 영광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미 이러한 사회적 영광의 성향을 부분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당신은 혹시 Lotte Giants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국대 축구팀으로 인해 흥분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팀에 관한 모든 dynamics가 이 단체적 과정에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모든 사람이 자아 이상의 대상 혹은 목적에 자신을 투사하고자 하는 성향[basking in other's glory]을 갖습니다. 바보스럽든 고귀하든 심층적인 원리는 같은 것입니다. 디폴트 디자인입니다. 다만 원시적인 단계이거나 계발된 단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되는 동력은 나이가 들면서 혹은 꿈을 잃어가면서 점점 사라집니다. 축구 국대의 승리로 인해 고양된 에너지는 아무리 흥분해도 고작 며칠이면 사라지지요. (2002년 한 때 한국인들은 한국이 우주 제 일의 국가가 될 줄 알았습니다.) 혹 나이 든 세대들은 이미 지난 과거의 안전한 기억에 의지하게 됩니다. 영광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과거의 앨범을 끊임없이 뒤집니다. 이 종류의 어떤 노력도 지속되지 못하고 순간 만을 머물고 사라집니다. 슬프게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일까요?


소자아에 머물 때 인생은 언제나 허무합니다. 수많은 유행가와 문학작품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수천 년에 걸쳐 조금씩 축적된, 자아의 허무성에 대한 다양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계속 세상에 속고 속습니다. 자아의 힘이 유효한 한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문화는 언제든 다시 그 빈 공간을 채울 것입니다.


소자아의 실현에는 전혀 사회적인 임팩트가 없습니다. 개인의 영광은 허무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역사에 이름이 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사후에도 그 승리를 즐기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어차피 자아는 무자비한 경쟁의 메커니즘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그 무자비한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들입니다. 기호의 의미는 항상 상대적이며 공중을 떠도는 것입니다. 의미를 둔다면 의미가 있고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침착했던 델피 신전의 배너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Know thyself!] 우리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깊은 심층까지 파악한 이후에야 현실 지옥에서 나가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새것을 얻으려면, 단순하게 같은 이상을 가진 [팀]에 속하면 됩니다.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을 설득하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한 무리의 사람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매우 강한 팀] 안에서 우리는 꾸며진 겸손이 아닌 진정한 겸손[humility]을 배우게 됩니다. 이 겸손이 매우 강한 에너지를 가져옵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거짓 꾸밈의 에너지 수준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지속하지 못하는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같은 이상 안에서 진정성을 갖으며, 이것이 [매우 강한 팀]의 지속하는 강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택하지 않겠지만, 모든 사람 안에 이 성향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Hamstead girl] by The Dream Academy, 2017 live in Tokyo


*Title Image: Untitled 1967 by Mark Roth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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