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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Jun 22. 2020

홀로서기

태풍이 온다 했다.
비가 무척이나 쏟아지던 그 날 차 안에서 Lou reed의 'perfect day'를 들었다.
"Just a perfect day, Drink sangria in the park. And then later when it gets dark, we go home..."
완벽한 날, 공원에서 샹그리아를 마시고 어두워지면 집에 간다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굉장히 일상적인 날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보내노라면 말 그대로 완벽히 멋진 하루이다. 가사는 일상적인 나날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들이 모두 완벽한 날이라 한다.

수증기를 머금은 마냥 뿌예진 창 밖에는 어슴푸레 해가 지고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도로 위를 달렸다.
비는 장대처럼 쏟아지다가는 흩뿌리고 꿉꿉한 공기의 차 안은 숨이 막혀갔다. 잿빛이 휘감은 구름 아래, 검어진 그림자처럼 그어진 도로 위 붉은 불빛의 행렬은 지루하도록 길었다. 마침 터널이 나왔고 형광등이 드리워진 푸르스름한 터널을 지나는 나는 사십을 지나고 있었다. 터널은 끝나는가 싶더니 또 다른 터널로 이어졌고 어느새 어두워진 밤을 지나친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은 삭막하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아마 그런 완벽한 순간은 희끗하게 지나가서 찰나로 기억되는 것 같다.
사십의 언저리를 지나고 있는 나는 터널을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흡사 십 대의 사춘기처럼 열정 있게 무엇을 해보고 싶다가도 쉽게 포기해 버리기도 하고 늘어나는 얼굴의 주름과 간간히 드러나는 흰머리에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주변에는 갑자기 돌아가신 분들이 늘어났고 축하할 일보다 조문을 가야 할 일이 많아 검은색 옷을 시시 때때 입었다.


내가 울다가 웃다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날, 꽃밭에는 소담하니 꽃이 피어 있었다. 톡 건드리니 까맣고 쪼글쪼글한 알갱이들이 손바닥 위에 놓였다. 분꽃 씨앗이다. 워낙에나 소박하고 단아한 꽃이다.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십상이고 크게 화려하지도 않다. 알아보는 이 없이 낮에는 꽃봉오리를 닫고 있다가 오후 느지막이 꽃을 피워낸다. 요즘에는 아파트 화단에도 종종 보이지만 말 그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강렬하지 않아 다들 지나친다. 게다가 오후 느지막이 꽃잎을 드러내니 유심히 보지 않고서야 분꽃의 존재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어릴 적에는 여기저기 많이 보이던 흔한 꽃이어서 분꽃의 까만 쥐똥과 같은 씨앗을 받아내어 여기저기 심어주기도 했었다. 분꽃은 오후 4시경 피는 꽃이라 하여 서양에서는 Four (4) o'clock flower라고도 불린다. 오후 네시는 나른하다. 예전에는 엄마들이 분꽃이 피는 것을 보고 저녁을 준비하러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꽃을 바라보다 중년이라는 시간이 분꽃이 피는 시간인 오후 시 언저리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림 속 어여쁜 새장 같던 나날들은 쏜살처럼 흐르고 콘크리트로 덮인 반짝임이 이제 벽돌 같은 책을 든 내게 성큼 다가왔다. 여전히 나는 앞으로의 나날들을 모르겠고 그 미지의 불확실함은 여전히 두려움을 끝없이 주기에 삶은 전설같이 느껴진다. 분꽃처럼 오후 네 시에 피운 꽃잎이 떨구어지고 까만 씨가 쪼글쪼글하게 남으면 또 나는 어딘가에서 다시 소박한 삶을 하루하루 퍼펙트하게 살아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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