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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또개 Dec 05. 2023

독일에서 파티는 처음인데요

사회화된 내향인

답답하게 얼굴을 감싸고 있던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아파트 단지 내에 주민들이 모였다.

사람이 얼마나 모였을까, 커튼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뒤늦게 직접 만든 김밥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쭈뼛쭈뼛 다가서는 남편과 나를 본 주민들은 순식간에 우리 주위를 에워쌌다.

호기심 가득한 눈들을 향해 나는 내 이름을 한 자 한 자 내뱉었고 그 순간 목구멍에서는 달갑지 않은 염소 울음소리도 함께 새어 나왔다.

(이런.. 제대로 입도 벙긋하기 전부터 이러면 곤란하지...)

나는 나오자마자 애써 벗어난 나만의 동굴로 다시 기어 들어가고 싶어졌다.






이사 온 지 거의 3년 만에 우리 아파트에서 첫 번째 그릴 파티가 열렸다.

코로나 이후로 사람 자체를 오랜만에 만나는 데다 외국인만 모여 있는 자리는 독일 와서 처음이라 긴장됐다.

극 내향형인 나는 다섯 명만 모여도 '입꾹닫'이 돼버리는데 형편없는 독일어까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번 모임에 못 나가면 나 혼자 도태될 것만 같고 나가자니 걱정이고, 갈까? 말까? 변덕이 죽 끓는 듯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혹시 비라도 오면 그 핑계로 취소되지 않을까 싶어 일주일 전부터 날씨 어플을 들락날락거렸지만 애석하게도 햇볕이 뜨겁다 못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우리 내일 캠핑 가야 하니까 오늘 30분 정도만 있다가 슬쩍 빠지자”


남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러자. 아니면 분위기 봐서 김밥만 두고 슬쩍 빠지자”






여섯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아침마다 엄마와 헤어져 유치원 버스에 오르는 게 힘들었다.

반나절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는데 이상하게 버스만 타면 엄마와 영영 헤어지는 것 같아 눈물이 터졌다.

게다가 아침만 되면 나의 친화력이 리셋되어 버리는 바람에 어제까지 잘 놀던 친구가 자고 나면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어색했다. 

(사실 이 기복은 불혹을 앞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에서 캠프를 가게 됐고 으레 그렇듯 나는 대성통곡하며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 무리에 익숙해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캠핑장 안에서는 날아다녔다.

걱정 한가득 품고 있는 엄마의 속도 모른 채, 나는 인디언 분장을 하고 무아지경 춤까지 추며 무대 한가운데를 평정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이날 아파트 파티에서도 그랬다.

가기 전까지는 죽상이었는데 오히려 그 안에서 적응이 된 뒤로는 남편이 집에 가자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우리 캠핑 짐도 아직 안 쌌잖아. 이제 일어나자"


점점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을 보자 나는 마지못해 무거운 궁둥이를 들어 올렸다.

우리는 30분만 있자는 처음 의도와 다르게 장장 7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이날은 내가 독일에 온 이후 가장 오랫동안 독일어로 말한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물론 알코올의 힘을 빌려 마구잡이로 내뱉긴 했지만, 상대와 '말이 통한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와 줄곧 대화를 나눈 옆집 부부는 열일곱 살의 딸과 함께 있었다. 

그 소녀는 아시아 문화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내가 가져간 김밥을 보고 대부분이 '스시'냐 물었지만 내가 '김밥'이다 정정했을 때 그 소녀만이 그 단어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아주 맛있게 먹어 주었다.

여담이지만 후에 그 소녀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김밥과 떡볶이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에도 관심이 많던 소녀는 K-드라마 광인 내게 '하백의 신부'와 '달의 연인'을 봤냐고 물었다. 한국 드라마라면 어떠한 장르도 가리지 않고 섭렵한 나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로 안광이 형형해진 소녀는 내게 중국 무협류를 무작위로 추천해 주며 내가 분명 좋아할 거란 말을 덧붙였다.

나는 한국 드라마 덕후지만 실망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추천 목록을 열심히 들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수다스럽게 변모한 그녀를 보니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그해 여름, 우리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연령과 직군을 만나 흥미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독일이라는 나라에 안착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매일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이어달리기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이곳에 있는 목적을 반추하며 계속해서 달려보고 싶다.

물론 이 굴곡진 길 위에서 생기는 후유증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남겠지만, 동시에 해냈다는 짜릿한 성취감도 기대된다.


가끔은 나다운 것과 나답지 않은 것, 내가 정해 놓은 그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제는 그 경계를 허물고 좀 더 자유롭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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