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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 THE RECORD Aug 14. 2019

나는 시간을 내어주는 선생님입니다.

나는 선생님입니다(7) 문구점 응 이중용 대표님

2019 온더레코드 기획 '나는 선생님입니다'의 일곱 번째 인터뷰는 문구점 응 이중용 대표님과 함께했습니다. 스스로 천직이라고 말할 만큼 사랑하고 좋아하는 교직을 떠나 문구점을 차린 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생각하는 흔한 문구점이 아닙니다. 바로 ‘삶은 예술이야!’를 슬로건으로 문구, 독립 출판물, 보드게임을 만드는 창작 스튜디오입니다. 다른 삶을 보여주는 선생님이자 동료가 되기를 꿈꿉니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과 직접 플래너를 만들었습니다. 


학생이 쓰던 독특한 기록에 친구들의 호기심이 더해졌고 자세히 뜯어보니 교육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방법의 기록이었어요. 제가 플래너를 만들 수 있도록 학생에게 스케치를 부탁했고, 표지 사진까지 직접 찍었습니다. 자비로 만들기엔 월급이 부족해 기획서를 써서 교장실로 찾아가 제안했고 지원비를 받았어요. 입시설명회처럼 플래너 설명회도 하고, 체험단을 꾸려서 운영하기도 하고, 기획자의 이름을 딴 상장 시상식도 했죠. 하루 종일 혹독하게 공부하던 학생들에게 떠들썩한 일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기뻤어요. 각자의 일기장에 적을 소소한 일 일지라도 함께 만든 작은 승리였어요. 교사나 학생에게도 이전의 학교에는 없었던 재밌는 일이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할 생각의 전환을 만든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가속도가 붙었어요.



성공의 요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학교에서 실제로 5년 일했지만 10년 일한 것처럼 느껴질 만큼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어요. 디자인씽킹으로 이야기하면 소비자의 엔드 유저랑 많은 시간을 보낸 것과 같죠. 학생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절로 이미지로 바뀌어서 플래너에 붙기 시작했어요. 몇 년에 걸쳐 플래너를 완성한 후엔 학교의 공식 플래너 제작 의뢰를 받았고요. 그런데 모든 학생들이 사용하면서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어요. 바로 플래너에 적을 일이 없다는 거죠. 수업시간에 한 일, 문제지 풀기, 공부 계획 등 매일 똑같이 일어나는 일상의 다음 계획을 채워나갈 뿐 일상의 변주가 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스스로 결정해서 선택한 일정이 없었던 거죠. 스터디플래너로만 쓰인다면 애초에 플래너를 만들며 세웠던 목표와는 달라서, 플래너에 적을만한 일상을 만들 일을 기획하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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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모든 솔루션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선생님 중에 이런 선생님도 있다는 선택지를 내 삶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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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학생이 무대에 서는 ‘프레젠테이션 파티오’가 시작되었군요. 


선생님이 프로그램을 이끌기보다는 학생끼리 자극을 주고 동기 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 상황과 콘셉트는 당시 유명해지고 있던 TED에서 따왔죠. 학생이 연사가 되어 시도의 이야기를 전한다면 다른 학생에게 확산되리라 기대했어요. 학생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어떤 것이 필요한지 살펴보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 찾을 수 있는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었어요. 가지고 있는 교과 교실을 플레이그라운드라는 공간으로, 배정되어있는 상담시간을 원한다면 자율학습시간에도 쓸 수 있도록 내어줬습니다.



교과 이외의 일을 지속하는 데에 교사 개인의 자원을 쓰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필요했나요? 


자신의 욕구와 진로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발견하고 지금 당장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하는 학생들이 늘어났고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동료 선생님들은 각자의 업무로 바빴기에 혼자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일했어요. 교사인 저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직접 학교 밖에서 배웠고요. 직접 아나운서 학원에 가서 스피치 교육을 수강할 만큼 담당 교과가 아닌 일도 해야 했어요. 실제로 스피치 교육을 잘하게 되었다기보단 교사가 배움을 찾는 태도와 선택이 학생에게 영향을 줍니다. 입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에게는 요주의 인물이었지만 선배들로부터 믿을만한 선생님이라는 추천을 받기도 했죠.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었나요. 


처음엔 모든 학생들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어요. 좋은 선생님이라고는 만화나 영화 속이나, 교실에는 없던 상상 속의 선생님만 있을 뿐 데이터가 별로 없었거든요. IMF 세대를 지나며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의 진로였던 때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돈 많이 받고 일찍 퇴근하는 직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 선생님이 되어서는 돈을 많이 받지도, 일찍 퇴근하지도, 모든 학생을 만족시키지도 못했지만 이 생각에 이르렀을 때 자존심이 상하기보단 내가 가야 할 방향이 뚜렷하게 보였어요. 선생님으로서의 인기는 내 시야를 가릴 뿐이라, 규칙 앞에 단호하지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모든 솔루션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선생님 중에 이런 선생님도 있다는 선택지를 내 삶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폭이 좁은 진로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이 있어요. 퇴직하고 다시 교사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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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나 영화 속의 선생님은 마음이 바쁘지 않았어요. 

학생들을 위해서 호흡을 고르고, 이야기를 듣고, 어떤 학생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충분히 내주는 선생님이었어요.


만화나 영화 속 선생님들의 어떤 모습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나요? 


마음이 바쁘지 않았어요. 학생들을 위해서 호흡을 고르고, 이야기를 듣고, 어떤 학생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충분히 내주는 선생님이었어요. 그 모습을 닮기엔 현실로 그대로 가져오면 지금 맥락에 맞지 않는 장면들도 많아요. 서울의 유명 인강 강사의 수업 실력을 따라갈 수 없다면 나는 시간을 내어 최선을 다해 수업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죠. 준비한 수업의 부족한 점에 대해 매 수업이 끝날 때 설문을 받고 다음 시간에 반영하려는 모습도 수업의 일부이고 배움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어요. 



퇴직 후에 문구점 응을 만들었습니다. 글을 쓰고, 오디오 클립을 녹음하고, 보드게임을 만들기도 합니다. 학교에서의 작업과 많이 다른 듯 닮게 느껴집니다. 


학교를 나왔을 때 교실도, 학생도, 도구도 없었어요. 공간은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당장 만날 수 있는 학생도 없었죠. 그래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하다 보니 도구와 도구를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좋아해 주는 팬이 생겼어요. 이제 공간이 생길 일만 남았네요. 앞으론 나름대로의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학교에서 공간과 시간을 내어주며 하고 싶었던 일과 닮았죠. 학생이어도 좋고, 꼭 학생이 아닌 직장인도, 퇴직자도 각자의 선택의 기로에서 응원해주는 공간, 사람,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각자의 이야기가 더 많이 퍼지고 또 모이는 생태계를 상상해요. 마치 버킷리스트에 쓰인 목록처럼 처음 10개를 써두고 8개를 달성하면 30개로 늘어나듯 상상의 폭은 계속 넓어지고 있어요. 계속 창작할 거예요. 학교에서 플래너를 만들었듯 결국 스스로 하고자 했던 것이 남아요. 



문구점 응은 아날로그한 도구와 경험을 만듭니다. 왜 아날로그인가요? 


평소에 메모하는 걸 좋아해요. 꼭 노트를 쓰는 건 아니라서 좋다는 노트 앱은 꼭 써보는 편이죠. 그때마다 앱을 거치며 기록들이 파편화되고 잃어버리게 돼요. 새로운 기술의 장점 이면에 내가 가진 원천적인 생각이 분해된다는 우려 때문에 아날로그 경험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사실 아날로그 노트는 예전부터 쓰여왔지만 노트를 대체하는 기기가 많은 지금 노트를 쓰는 행위는 훨씬 희소하고 유용합니다. 집중이 더 잘된다거나, 창작을 위해서라거나 목적으로 두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매 순간 접속되어있는 다음 세대에게 거꾸로 언플러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문구점 응은 계속 아날로그한 도구와 경험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어요.



교사는 어떤 변화를 마주하게 될까요. 


교사가 프로젝트를 운영할 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촉진자이고 퍼실리테이터라고 이야기 하지만 소극적인 관찰자로 잘못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영화 앤더슨 게임에서 어른의 전략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교관으로서 아이들을 기르고 지켜보듯이 말이죠. 결국 아이들은 자신들의 전략으로 외계인을 물리칩니다. 프로젝트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 선생님도 동등하게 참여하면 어떨까요?



인터뷰 노트 

이렇게 '나는 선생님입니다' 7주간의 인터뷰 시리즈를 끝맺습니다. 다른 직업에서 교사로, 일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학교 안에서 다른 교사로, 교사에서 다른 직업으로 옮겨가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담았습니다. 이중용 대표님의 이야기를 가장 마지막에 싣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의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던 7주간의 여행을 끝내고 다시 온더레코드에서 새로운 배움을 찾는 교육자분들의 여행을 안내할 예정입니다. 여전히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필요하지만 작은 것부터 빈 틈을 찾아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며 메꾸는 분들 덕에 온더레코드는 분주합니다. 각각의 시도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지만 온더레코드에 모이는 시도들을 보며 함께 만드는 재미있는 실험을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제게 큰 영감을 주신 7분의 선생님께, 함께 인터뷰를 읽고 의견을 나누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더 긴 대화는 온더레코드에서 나눠요! 


글 & 인터뷰. 황혜지, C Program 러닝랩 매니저


매주 수요일 온더레코드의 뉴스레터가 새로운 배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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