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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l 25. 2021

나는 팔월보다는 키가 조금 작은 어린 여름입니다

2021. 7. 24


누나, 여긴 칠월의

팔월보다는 키가 조금 작은 어린 여름이에요

담벼락에 맺힌 능소화 봉우리를 홀짝 마시고

해가 질 때쯤의 하늘을 검지로 문지르다 보면

언젠가는 손바닥에 설익은 능소화가 노을빛으로 활짝 필까요

다 자라지 못한 마음과는 매번 친해지고 싶습니다

이참에 담벼락의 덩굴이 되어볼까도 싶거든요


어딜 가던 그때처럼 울창해지세요


달리기 시합에서는 아무도 나를 이기지 못해요

특출난 발을 두 개나 가지고 있거든요

특히 사랑을 할 때 앞서가는 건 훨씬 쉬워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누나가 보이지 않네요


안타깝게도 뒤로 걷는 법은 배우지 못했어요


빈방의 바깥으로 가득 찬 하늘을 내다보자면

사랑했던 이름들이 쪽배처럼 둥둥 떠다녀요

그래서인지 하늘 좋은 날이 잦은 건가 봐요

부르고 싶은 이름들은 아직도 나를 웃게 하거든요

태풍이 이곳으로 불어오지 않기를 바라요

그 이름들이 다치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칭찬보다 기쁘게 불렸으면 좋겠거든요


지금 여긴 비가 너무 쏟아 넘쳐버렸어요

이전에 우리가 나눠 가진 양보다도 많으니

거긴 진종일 맑은 날만 계속될 거예요


나도 언젠가는 누나처럼 바싹 마를 수 있어요?


누나 손에 깍지 끼는 상상 몇 번에 어느덧 밤이네요

별잎 무성한 달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이만큼 내가 안겨있는 것 같아요

쏟아질 듯한 것들은 모조리 피하고 말 거예요


나는 칠월의

팔월보다는 키가 조금 작은 어린 여름입니다

여기선 누나가 보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만

여전히 너무 쏟는 비에 흠뻑 젖는 중이에요


무지개가 구름 뒤에 숨어 차례를 기다립니다

별안간 내리쬐는 불볕 아래 젖은 머리를 세차게 털면

누나 이름이 빨주노초파남보 예쁘게도 드리워요


누나,

이름 말고도 기억하는 게 아주 많아요

누나는 내 이름 잊지 않으셨죠

이렇게 말해줬던 것도 잊지 않으셨죠


“우린 이제 각자의 팔월이 되어야만 해.”


나는 팔월보다는 키가 조금 작은 어린 여름입니다, 하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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