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준비할 권리에 대하여
(스포일러 있음)
<크로닉>은 아주 조용하고 잔잔하지만 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종일관 정지된 채로 마치 액자 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게 한다.
노골적이지만 자극적이지는 않게 죽음을 앞둔 자와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의 심경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나에게도 계속 질문을 던진다.
나도 영화를 보며 질문을 던진다.
데이비드의 저 달리기는 언제쯤 끝날까.
답이 없는 질문일 줄 알았는데 영화가 답한다.
그리고 굉장히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것은 엄청난 도전이면서,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영화와 아주 잘 어울리는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닉>은 아주 친절하지 않은 영화 같으면서도 매우 친절한 영화이다.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좋은 죽음에 대하여.
죽음을 준비할 권리.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과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영화 속 환자들을 더 힘들게 한다.
내가 그들이라도 그랬을 것 같다.
아니 나는 더할 것 같다.
나는 그들처럼 견디지 못할 것 같다.
마사처럼 죽고 싶을 것이다.
우리 이모는 고등학교 때 갑자기 체육 시간에 쓰러진 이후로 근육병 장애인이 되었다.
내가 이미 태어났을 땐 이모는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고 계셨다.
어려서부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모가 약한 상태인 것은 알고 있었고, 나도 갑자기 그렇게 될까 무서웠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는 약간의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이모는 약해 보이지만 약하지 않았다.
지금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계신다.
나는 그럼에도 자신이 없다.
내가 그렇게 된다면 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태어날 때 누구도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갑자기 이 세상에 던져졌다.
그리고 간혹 내 선택이 아니었기에 다시 죽음은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욕한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살자.'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욕하는 이유는 '남아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가 많은데 그럼 우린 언제 오롯이 나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럼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러운 환자들의 존엄사는 어떨까.
자다가 아침에 안 깨고 그대로 죽는 게 내 바람인데 그게 얼마나 어렵고 복 받은 일인지 이번에 또 깨달았다.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할 권리,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사일런트 하트>나 <프랑스 영화처럼> 속의 A time to leave도 이 이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죽음이 언제 올진 모르나 나도 막연하게 그것이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또 그때 되면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크로닉>을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영화들에 익숙한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자극적이긴 했지만, 음파처럼 쏘는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