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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느낌은 이유에 앞선다

고선경, 「건강에 좋은 시」

by 고전파 Apr 02. 2025

고선경, 「건강에 좋은 시」  


엄마는 늘 무언가의 효능을 궁금해한다

블루베리 효능

토마토 효능

치자 효능     


나는 다정의 효능이나

시의 효능에 대해 골몰한다     


감동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관심……

받겠냐?     


내 시에 비타민이나

식이섬유가 함유돼 있지는 않아     


그래 한국인한테는 밥이 보약

밥 잘 먹고

시 쓰든 말든 오래 살아     


근데 봤지 엄마

쟤가 나보고 웃었어     


엄마가 블루베리를 먹는 이유는

블루베리가 눈에 좋기 때문이라는데     


뻥이고 엄마는 그냥 블루베리를 좋아한다                   











           

            미학자 진중권 교수의 저서 『미학 오디세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는 순간에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누가 아름다운지, 또는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즉각적으로 구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러한지를 따져보게 된다면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게 핵심이다.      


어떤 게 아름다운지 잘 알면서도, 정작 그게 아름다운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미의 관념은 ‘혼연’하다. 미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그 무엇 Je ne sais quoi’이 남기 마련이니까.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36쪽.


            이 내용이 흥미로운 것은 이 판단 원리가 단순히 미추의 구별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호오(好惡)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혹은 좋아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느낌을 즉각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왜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 정작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곰곰이 생각을 거친 뒤에야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설명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대체로 우리는 그 호오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격언을 마음대로 전유하자면, ‘느낌은 이유에 앞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시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느낌이 이유에 앞서는 경험을 하고 있다. 시를 쓰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다정이나 시의 효능을 궁금해 한다. 화자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시에는 비타민, 식이섬유와 같은 영양가가 함유되어 있지 않다. 차라리 시를 쓰든 말든 밥이나 먹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감동, 관심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시에 대한 태도는 직접적으로 발화되지 않고 이렇게 에둘러 표현된다.      


              시에 대한 화자의 진심은 이 시의 처음과 끝을 담당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경유해 우리에게 당도한다. 엄마가 블루베리, 토마토, 치자의 효능을 궁금해 한다고 언급한 후에 화자의 시에 대한 넋두리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시의 끝에 이르러서야 엄마와 블루베리는 다시 등장한다.    


       

엄마가 블루베리를 먹는 이유는
블루베리가 눈에 좋기 때문이라는데

뻥이고 엄마는 그냥 블루베리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대상에 그럴싸한 이유를 붙이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다. 자신의 감정이 모호한 채로 존재하는 걸 인간은 견디기 어려워한다. 따라서 이름표를 붙이고 그 밑에 설명을 달고 싶어 한다. 감정의 스펙트럼은 마치 빛의 스펙트럼 같다. 세분화된 각각의 감정들에 정확한 이름조차 붙이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그 감정의 이유를 찾기도 쉽지 않다. 엄마는 간신히 블루베리를 먹는 이유를 찾아내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화자는 그 속에 숨겨진 엄마의 진심을 포착한다. 사실 그 모든 효능과 이유는 ‘뻥’이고 엄마는 블루베리를 ‘그냥 좋아한다’는 걸.      


             그렇다면 이는 화자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화자가 다정과 시에서 특정한 효능을 발견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다정과 시의 무용함 때문일 수도 있다. 작금의 시대에서 시는 읽는 것조차 고리타분한 취미처럼 느껴진다. 한술 더 떠서 시를 쓰는 행위는 경제적이지도 못하다. 시집 한 권을 팔았을 때, 시인은 천원 남짓한 돈을 손에 쥘 수 있다. 시집을 만 권 파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며 그런 경우에도 약 천만 원 정도를 벌 수 있을 뿐이다.


            차라리 시가 세상을 계몽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다면 거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시를 읽는 일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담아내도 그걸 전달조차 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화자가 시 쓰는 일에 좌절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좌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화자가 다정과 시를 그냥 좋아한다는 것. ‘도대체 돈도 안 되고 지루한 시를 왜 쓰니?’라는 물음에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는데 실패한 화자는 마침내 엄마에게서 그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왜 좋아하냐고? 이 시가 다정하고 따뜻하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뻥이고 그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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