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화,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사고 체계를 독립적으로 유지하는 능력
또 시작이다.
또. 마음 한 켠이 시려온다. 당장이라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울어 토해내지 않는다면 마음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이 아린 마음. 하루 중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이 위험한 감각을 무시한 대가는 너무도 크다. 집중은 흩어지고 호흡은 가빠지고, 어느 순간 심장 부근을 후벼 파는 통증이 된다. 내가 아는 한, 내가 의식적으로 불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무 일 없이 지내는 일상 속 어떤 감각 중 하나가 방아쇠가 되어 무의식 속의 기억들을 빠르게 끌어올린다. 그것은 아직도 이 어떤 숙명에서 벗어나는 비밀의 열쇠를 여전히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 침입자
까맣게 탄 얼굴에 군데군데 묻은 흙과 흠뻑 적신 땀을 훔치는 중년 남성, 동네 미용실에서 가장 저렴한 파마머리에 유행에 한참 뒤처진 옷차림으로 지나가는 중년 여성, 친구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혼자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누군가, 입대를 앞두고 불안에 짓눌린 청년들. 그들을 볼 때, 가족이 떠오르는 건 이해한다. 그런데 퇴근 후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누리기 직전에, 이미 말기 치매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엄마가 ‘맛있다’라며 행복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면. 한여름 잘 익은 수박을 한 아름 안고 와 한 입 베어 물려는 찰나에, 콧줄로 식사하며 밥을 먹는 다른 환자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이 떠오르면.. 그러니까 내 말은, 그리 많지도 않은 편안한 시간마저도 이렇게 내 의식에 침입해 버리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활하라는 말인지.
| 책임의 화살
시린 마음을 잠재우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불시에 떠오른 그 가족의 입장을 곱씹고 이해한 뒤, 나를 처벌하는 결과를 내어주면 된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었잖아’, ‘내 잘못이야’, ‘내가 바뀔게’ 그렇게 모든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면 비로소 끝난다. 왜 억지로 이해하고 자신을 처벌해야만 끝이 나느냐, 억지스러운 내 방법에 항변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이런 말들로 핑계 대고 싶다. 누구의 의견도 묻고 들을 수 없기에, 나 자신을 붙잡고 이유를 캐묻고, 내 안에서 답을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합리화를 해도, 반항을 해도 누구도 ‘내 책임이었다’며 마음의 짐을 덜어줄 사람이 없으니, 되도록 빨리 ‘내 죄’를 찾아내어 내가 바뀌는 것이 덜 고통스러운 길이었다는 말로 말이다. 그러나 부작용이 한 가지 있다면, 잠깐의 시일이 지나면, 또다시 스멀스멀-. 내 죄책감을 먹고사는 그 숙명의 벌레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 사랑이란 이름의 족쇄
당신들은 내게 상처인가, 사랑인가.
파괴인가, 성장인가.
불행인가, 행복인가.
미워하다가도 그립고, 저주하다가도 붙잡히는 이 지독한 모순의 형벌은 언제 끝이 날까. 내게 무엇을 그토록 알려주고 싶어, 평온한 순간마다 그렇게나 심장을 두들겨대는지.
제발 좀. 가, 족같은 숙명아.
| 당신의 가족의 '이름'은
가족은 누구에게나 사랑과 상처를 동시에 안겨주는 양가적 존재이다. 보웬(Murray Bowen)의 가족체계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라는 감정적 단위(emotional unit)에 속해 있고, 그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특히,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의 정도는 각자가 얼마나 가족의 기대, 감정, 무의식적 패턴에 휘둘리는지를 결정한다.
저자가 겪는 이 반복되는 사랑과 증오의 모순은, 분화도가 낮을 때 경험하는 감정적 융합(emotional fusion)과 세대 간 반복되는 감정 반응의 전이(multigenerational transmission process)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즉, 감정이 침입하고, 죄책감이 나를 덮치는 순간들은 내가 아직도 가족 관계에서 분화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삶에 가족의 기억은 숙명(어떤 이들에게는 벌레 같은)처럼 새겨져 있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벗어나려 하면서도 붙잡는다. 그 모순된 관계엔 [경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가족의 기대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내 선택을 끝까지 믿어주는 마음도.
당신의 가족은 상처인가, 사랑인가. 이 모순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