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소통의 아이러니
| 공주의 입학
위 학생은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근면 성실하며,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에 표창함.
강당에 한 이름이 울려 퍼졌다. 친구의 이름이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부러움과 대견함이 섞인 시선들이, 쑥스러운 얼굴로 교단을 오르는 그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갔다. 타의 모범은 무슨. 선생님들은 몰라, 쟤가 얼마나 까부는지. 저건 내가 받아야 한다고. 혹시라도 들릴까 나는 박수를 더 크게 쳐 보이며 마음의 소리를 감췄다.
‘이번 학예회 반주는 누가 해볼까?’ 나는 이미 손을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분명히 집에서 피아노를 치면, 모두가 ‘잘한다’는 말을 했으니까. 막 손을 들려는 찰나, 선생님이 말했다. “세정이가 체르니를 들어갔다고 하던데, 이번 반주는 세정이가 하자.” 미처 들지도 못한 내 손끝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마치 빼앗긴 것만 같았다. 피아노가 주연인 그 무대는 친구에게 넘어갔고, 나는 객석에서 박수를 치며, 또다시 내 마음을 슬쩍 흘렸다. ‘체르니 100이라면서, 이 정도밖에 안 돼?’, ‘나라면 더 잘했을 텐데, 선생님은 왜 쟤를 저기에 세운거야.’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나라의 공주들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 빼앗기고 싶지 않아
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특별한 아이였다. 글을 잘 읽는다며, 잘 걷는다며, 무엇이든 곧잘 해낸다며, 부모님은 늘 내가 남다르다며 추켜세웠다. 피아노에서 도레미만 연주해도 박수를 받았고, TV에 나온 장면을 흉내만 내어도 모두의 웃음을 얻었다. 그 작은 나라 안에서는 언제나 모두의 관심을 받는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학교의 문을 열자마자 내가 알던 세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더 예쁘고, 공부는 더 잘하고, 더 매력이 많고 눈부신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세상에는 이미 다른 공주들도 살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들을 가만히 두면, 나는 평범한 배역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을 주인공 역할에서 끌어내려야만, 다시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술은 다양했다. 더 화려하고 예쁜 옷을 입고, 멋진 무기를 휘두르며 내가 그들보다 더 빛난다고 믿게 만들거나, 은근히 소문을 흘려 그들이 쓴 왕관에 흠집을 내기도 했다. 내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다. 마지막에 나부끼는 깃발은 반드시 내 것이어야만 했으니까.
| 자기 혐오자의 1인극
시간이 흘러, 내 깃발은 이미 다른 아이들에게 뽑혀 나갔고, 더 이상 도레미나 흉내 내는 모양새로는 박수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대학 시절까지는, ‘성적’이라는 기준이라도 있었기에, 그 점수에 매달려 흔들리는 자존감을 간신히 지탱했지만, 사회에서는 그마저도 허상이었다. 부모님은 더 이상 내 무대 위 조명을 들어줄 힘이 없었고, 친구들도 더 이상은 내 얄팍한 전술에 속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특별하게 보지 않았다. 나를 특별하게 보여 낼 건덕지도 없었다.
전력을 잃은 채, 주변을 가만히 보다 보니 더 좋은 학벌, 더 높은 연봉, 근사한 연애와 신비한 나라로의 여행 이야기가 쏟아졌다. 환하게 웃어 보이며 ‘잘됐다’ 말하는 이 몸뚱아리 안에서는 부아가 치밀었다. 어째 나 혼자만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게다가 내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이상한 센서(어쩌면 양심이라고들 부르는)가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축하한다고 말하는 순간, ‘거짓말! 사기꾼!’이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겉과 속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있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떨기는’ 그들의 성취를 먼저 깎아내리고 나면, 그제야 축하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연기도 오래가진 못했다.
자존감 낮은 사람의 특징, 나르시시스트의 특징, 절대로 어울려 지내면 안 되는 사람, 손절해야 하는 친구... 대인관계 자기 계발서나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간 영상에서는 내 모습을 고발하고 있었다. 펼쳐 본 댓글창엔 ‘그런’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이 쏟아놓은 원망이나 분노가 가득했고, 그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한 것 같았다. 나는 도망쳤다. 내 전술도, 연기도 다 들킨 것만 같았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지우고,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무대를 만들었다. 관객 없는 1인극을 하리라. 성공해도 실패해도 오직 나만 아는 무대라면, 주인공 자리를 빼앗길 일도, 누군가와 비교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아무의 기준에도 매이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관객이 없는 무대는 죽은 무대였다. 박수든 야유든 좋으니 누군가의 눈길이 절실해졌다. 결국 나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 공주의 민낯
무대 위 조명을 모두 내렸다. 남들이 박수를 보내던 시절은 끝난 지 오래, 그렇다고 혼자만의 무대에 숨어 환상 속의 나를 붙잡고 있는 것도 외롭고 부질없었다. 무대 밖을 나가 보니, 화려한 줄 알았던 의상은 해져 있었고, 분장은 번져 얼굴 위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꼭 쥔 손에는 부러진 깃대뿐이었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닦아냈다. 분장을 지우자 낯선 얼굴이 비쳤다. 씨익.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이는 모습이 어색했지만 내 얼굴이었다. 다 해진 드레스도 벗고, 몸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특별한 장식은 없었지만, 걸음은 훨씬 가벼웠다. 다 떼어내고 남은 이 모습은 공주도,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냥 ‘나’였다.
두 팔을 걷어올리고 청소를 시작했다. 조명 뒤 어둠 속에 곰팡이가 핀 벽이 드러났다. 한참을 닦아냈다. 허술하게 막아둔 비 새는 천장도 고쳤다. 부러진 깃대 조각들은 모두 버렸다. 혼자 버거울 때는 친구와 남편에게 도움을 구했다. 내 방을 뒤덮은 무대 장치를 걷어내자, 누군가의 인정으로 꾸며낸 공간이 아니라, 내 방이 드러났다.
|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좇아 달려가고 있었던 걸까. 다른 사람들의 성공도, 나를 특별하게 바라봐주지 않은 사람들도 문제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이루어도 다른 사람의 것과 견주어 내 것을 시시하게 만든 사람, 더 높은 곳에 깃발을 세워야 한다며 남들의 기준에 끼워 맞추자고 소리친 사람은 나였다. 잘난 너를 끌어내리겠다며 뒤꽁무니를 따라다닌 것도, 그 끝없는 전쟁을 부추긴 것도 나였다. 그렇게 타인의 반응에 정신을 팔던 사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 방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방 안 청소는 덜 되었다. 아담한 평수에 군데군데 닦이지 않은 얼룩도 남아 있지만, 그런 방 한가운데에 둘러앉아 그저 편안하게 웃고 떠들고 싶다. 문을 열어본다. 마침내 비교와 자책에 짓눌렸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너를 응원한다. 그리고, 동경한다.
비로소 숨이 트인다.
| 심리학자의 생각: 관계와 소통의 아이러니
사람들은 타인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을까? 또, 타인의 실패를 진심으로 아파하며 위로할 수 있을까? ‘완벽한 타인’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타인’을, 학창 시절 당신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이름으로 바꿔본다면 - 여전히 대답은 ‘그렇다’일까?
이 글은 작가의 질투심에서 출발했다. 친구의 성공에 억지로 축하했고, 친구의 실패에는 슬픔을 연기하며 살아온 자신을 마주하면서, 과연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 ‘정말로’ 어울릴 수 있는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소통을 위해 탄생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역설적으로 이용자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열등감의 씨앗을 심는다.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순간들만 공유되는 그 공간에서 질투와 열등감, 자기혐오가 치솟는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심리학 이론 중 [사회비교이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이 없을 때 타인과 비교하며, 집단 내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성향이 모두에게 있다’라고. 나보다 못한 사람과의 비교(Downward Comparison)를 통해 위안을 얻고, 현실에 안주하기도 하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과의 비교(Upward Comparison)를 통해 성장의 동기부여를 얻기도 한다. 이러한 비교를 적절히 활용하면 건강한 만족감과 도전 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비교를 통제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현실적인 자존감을 형성했다가도 상대적 박탈감으로 스스로를 느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또 다루고 싶은 한 가지는, [우월감]과 [열등감]에 대해서다. ‘취약한 나르시시즘(vulnerable narcissism)’ 연구에서는, 화려한 외형 뒤에 깊은 상처를 감춘 사람이 많다고 한다. 즉, ‘우월성’이 크면 클수록 심각한 내적 ‘취약성’을 동반한다. 스스로 특별하다는 견고한 껍질 아래엔, 연약한 자존감과 수치심이 들끓고 있다. 주변에서 과도하게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조금 더 생각해서, 그들은 어떤 면을 가장 우월하게 보이도록 치장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장 감추고 싶은 부분이다. 반대로 과도한 자기비판을 일삼는 이면에도,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이 폭발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어른들의 끝없는 칭찬과 학창 시절의 수많은 종목들의 상장 수여를 통해, 우리는 즉각적 인정에 익숙해졌다. 무언가를 해내면 반드시 상향하는 결과가 뒤따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들처럼 명확한 보상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 주어진다고 한들, 모호하고, 흐릿하고, 심지어는 느리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쌓은 이상적 자아와 현재의 현실적 자아 사이의 간극이 커지면서, 우리의 정체감은 더 크게 흔들린다.
다시 묻는다. 정말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저자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아니, 마주 보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걸을 땐 땅을 보고 걷는 경우가 허다했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할 때도 상대의 눈이 아닌 다른 곳을 보며 얘기하곤 했다. 내 안에서 들끓는 비교와 질투, 그 취약한 마음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비교하며 남을 끌어내리다 못해,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눈길을 모두 거두고, 고유한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제야 나는 얼굴을 들 수 있었다.
어쩌면 저자의 오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 남은 부러움, 서운함, 질투 같은 감정들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어두운 감정들이 그저 우리에게 상처만 남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들은 나와 타인이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자,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갈망하는지를 알려주는 징표이다. 그 틈에서 고유한 내 모습과 조우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나만의 무대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지금,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