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무너진, 완벽한 연기
너는 힘들 때 어떻게 상담해?
심리학을 전공한 나에게, 친구들은 간혹 심리학적 지식이나 조언을 구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면, 꼭 이런 질문이 따라온다. - 너는 힘들 때 없어? 그럴 때 어떻게 해? - 상담을 할 때도, 한 내담자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 선생님은 이런 얘기 들으면 안 힘드세요? 힘들 때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 상담자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따뜻한 질문이었지만, 막상 대답하려니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지? 아니, 나는 힘들다는 건 느끼고는 있나?
| 나는 전문가니까, 이상하지도 않고 미숙하지도 않아.
심리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세부 전공*으로 임상과 상담을 배우는 동안, 나약하디 나약한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전공 서적에 나오는 '무서운' 사례들처럼 심리학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응당 심리학을 공부했다면 말이지, 이런 것들은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미숙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전문가 수련을 받으면서부터는 이 강박이 더 심해졌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힘들다는 걸 들키는 순간, 내 전문성이 증발해 버릴 것 같아 언제나 너그러운 척, 부러운 인생들을 다 초월한 척, 마치 완벽한 어른이 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륜이 깊은 선배들이 다 아시는 것처럼, 인생은 그런 날 가만두지 않았다. 가족, 연인, 친구, 진로 등 흔한 삶의 고민들이 차례대로 밀려와 나를 흔들어댔지만, 꾹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공황 증상이 찾아왔다. 큰일이었다. 이런 일로 두려워 병원에 가거나 상담을 받으면, 나는 이 직업을 할 수 없게 될 텐데. 이 좁은 바닥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해. 그러면 내가 쏟은 시간과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거겠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내게 중요한 건, 나의 기질적, 환경적 나약함을 모두 이겨낸 임상가, 상담가로서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전문가가 되었고, 나의 첫 상담의 내담자는 공황 증상을 겪고 있었다.
| 무너진 전문가 연기
그런데 상담을 하는 동안, 나는 이상한 괴리감을 느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밖으로 내뱉는 걱정스러운 말과 달리, 감정은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공황을 겪는 내담자의 두려움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잘 참아내고 있는데, 왜 이 사람은 이렇게 힘들어할까? 그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다 보니, 상담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던 어느 날, 또다시 공황이 찾아왔다.
잘 참아낸 줄 알았는데, 스트레스도 별로 없는데 왜 이러지? 괜찮아. 벗어나는 데 집중하자. 나는 그동안 배운 지식들을 총동원해서 닥치는 대로 실천했다. 심호흡, 명상, 규칙적인 식사와 숙면, 동료 상담 등. 그런데 이번 녀석은 맘을 단단히 먹고 왔는지, 이인증**까지 데리고 왔다. 컴퓨터를 켜 작업을 하려는데, 머릿속이 멍해지고 모니터가 흐릿하게 보였다.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강의를 들을 때는 갑자기 이 공간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심장 박동 수가 빨라졌고,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도, 서로 오가는 대화 내용이나 감정이 영 멀게만 느껴졌다. 뭐가 저렇게 재미있어서 웃을까? 혼자 고립된 섬에 갇혀, 반복해서 재생되는 오래된 TV 프로를 멍하게 보고 있는 것처럼, 현실과 나 사이에 어떤 유리막이 하나 있는 듯했다. 그제야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담소에 연락을 취했다. 더 이상 안 괜찮아.
| 공감을 배우는 심리학자라니.
나는 직업을 밝히지 않은 채 상담실에 앉았다. 그리고 10회기의 상담을 받는 동안, 내 안에 깊고 거대한 감정들이 얼마나 오래 억눌려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모든 걸 괜찮은 척하며 버텨왔지만, 사실 단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상담자가 건드리는 내용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고, 분명 잘 다독이며 넘어간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과거들, 그때 느낀 감정 끄트머리에는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담자는 나에게 죽도록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건조하고 메마른 '분석'만 하고 있다며, '정서 지능 지체' 판정을 내렸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감정에 머무르는 방법을 배워갔다.
여러 시도 끝에 나의 고통을 고통으로 인정하고, 그때 느낀 감정들을 다독여 주고 나니, 내 앞에 앉은 내담자의 어려움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머리로만 이해되던 것들이, 어렴풋하게 느껴져 내 감정을 자극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감정이 흔들릴 때, 나도 같이 흔들렸고, 그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 공감되어 가슴이 아팠다. 상담 중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버린 적도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인정해야만이,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을.
| 프롤로그를 마치며
부작용이 있다면, 아직까지도 나는 밀려오는 감정들을 다룰 만한 능력이 부족한데, 이제는 오히려 더 많은 감정에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갈 삶 속에서, 흔들리는 순간들을 붙잡아 글로 남기기로 했다.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꼈고,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를 분석하다 보면, 내가 만나는 환자들과 내담자들의 감정을 더 세심하게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이 감정들을, 진정으로 단단하게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심리학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를 연재하며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로 흔들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 책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약한 작가의 삶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뭐야, 심리학 전공자도 이렇게 흔들리구만, 뭐. 하고 자신에게 무수히 보냈던 못마땅한 시선을 거둘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만약 이 글 속에서 당신과 닮은 순간을 발견했다면, 오래 침잠되어 있던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내느라 외면했던 고통을 마주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먼저 위로와 공감을 건넬 수 있기를.
*심리학에는 크게 기초, 응용 분야가 있는데, 기초 심리에는 인지, 생리, 발달, 사회, 실험 등의 세부 전공이 있고, 응용 심리학에는 임상, 상담, 산업 및 조직 등의 세부 전공이 있다.
**이인증(Derealization & Depersonalization): 자신이 현실에서 분리된 것처럼 느끼는 상태, 주변 환경이 낯설거나 꿈처럼 느껴지거나, 자신이 마치 제3자의 시점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 같은 감각이 특징이다. 심한 스트레스나 불안, 공황 장애와 함께 나타날 수 있으며, 현실 감각이 희미해지는 불안한 경험을 동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