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is Actually Everywhere
최근 바뀐 정책 때문에 우리가 가진 비자로는 입학이 불가하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세 자매의 전입학 서류를 처리하던 행정 담당자는 안경을 벗고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적잖게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가 연결될 때마다 우리의 사정을 알리고 다시 새 통화가 이어지면 처음부터 설명하길 반복했다. 바다 건너온 어린 학생들을 이렇게 돌려보낼 수 없다는 듯 그는 끈질기게 방법을 찾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지 않은 그의 오른손도 바빴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 중앙에서 헤어진 엄지와 검지는 눈썹 위를 지나 눈밑을 거쳐 높은 콧대 위에서 다시 만났다. 유난히 긴 손가락으로 팔자모양을 그리고 또 그렸다.
‘저러다 너구리가 되는 건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바라보는데 전화릴레이가 끝나면서 다행히 팔자 그리기도 멈췄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우리 아파트 주소의 학군에서는 등록이 불가하지만 그 옆에 학군은 가능하단 기쁜 소식에 창문 하나 없는 좁은 사무실에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옆 학군은 그레이스언니 집이 있는 지역과 맞닿아 있어서 거기서 스쿨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그곳은 주택가에서 떨어진 곳이다 보니 우리가 가장 먼저 버스에 타고 제일 마지막에 내릴 거라 했다. 매일 아침 이동해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더해졌지만, 미국까지 와서 학교에 못 가게 되는 비극보다는 훨씬 가벼운 불편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대망의 등교 첫날, 첫째 언니는 먼저 출발했고 둘째 언니와 나는 망을 보는 미어캣처럼 진입로 입구에 서서 큰 도로 쪽을 응시했다. 수풀에서 몰려온 야생모기떼의 습격에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 전체가 빨갛게 물리고도 잔뜩 긴장을 해서인지 가려운지 몰랐다. 곧 거대한 버터스틱 같은 노란 스쿨버스가 나타나 우리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칙- 철컥.”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 앞문이 왼쪽으로 미끄러지고 미지의 세계가 열렸다.
“굿모닝!”
얼굴의 반을 가리는 큼직한 선글라스에 금색 링귀걸이로 멋을 낸 흑인운전기사 미세스 그린이 인사를 건넸다.
“굿.. 모닝.”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머쓱해진 우리는 도망치듯 자리에 앉았다.
멋쟁이 운전기사는 잠시동안 큰 도로를 달리다가 주택가로 핸들을 틀었다. 마을 곳곳에 대기 중인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픽업해 버스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뭐니 뭐니 해도 이날의 핫토픽은 홀연히 나타난 동양인 자매였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지만
“From Korea. 한국에서 왔어.”
“I can’t speak English. 영어는 못해.”
말할수록 움츠러 드는 두 문장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하며 학교에 도착했다.
넓은 초원 끝자락에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단층짜리 건물이 펼쳐져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노란 버스들이 질서 정연하게 커브를 돌아 학생들을 본관 입구에 바로 내려주고 멀어져 갔다. 하루분량의 불량식품을 양주머니 가득 쟁일 수 있는 학교 앞 문구점은 없었다. 손에 든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가로지르는 흙으로 된 운동장도 보이지 않는 등굣길이 낯설기만 했다.
이제 언니는 동관으로 나는 서관으로 헤어질 시간이었다. 이 순간부터는 옆에 의지할 사람도 통역해 줄 사람도 없는 손에 땀을 쥐는 각자도생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다.
시골 학교의 권태로운 학기말, 한국에서 온 전학생으로 교실은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국땅에서 완벽한 주인공이 되는 황홀함은 잠시뿐이었다.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되어버렸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고 제대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면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공포에 가까웠다. 슬로모션에 걸린 것처럼 하루가 천천히 흘러갔다.
“Brrrrrring!”
거친 금속 종소리가 잔뜩 굳어있는 몸에 부딪혔다. 오늘의 수업과 묵언수행을 마치고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37번 버스에는 눈을 감고 지친 얼굴로 앉아있는 또 한 명의 묵언수행자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앉아 무거운 눈을 감았다. 미국학교에서의 첫째 날이 어땠는지…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빠짐없이 들렸다.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 하루 종일 한 게 없는데 이렇게 지칠 수 있다니 신기했다.
버스의 움직임이 느껴져 눈을 떴는데 운전석 백미러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상체길이가 짧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훤칠한 앉은키 덕분에 벤치형 등받이 위로 홀로 동동 떠있는 내 얼굴은 웃겼지만 짜증이 났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꾸만 튀는 게 속상해서 숨고 싶은데 제일 마지막에 내려야 한다니. 운명이 여러모로 너무했다.
버스 종점에서 일어선 언니와 나를 황급히 멈춰 세운 미세스 그린은 가디건으로 감싸둔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가 전해준 갈색 종이봉투를 받아 든 내 두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봉투 안에는 오븐에서 갓 구워내 아직 따뜻한 초콜릿칩 쿠키가 들어 있었다.
"Thank you."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말 중에 한 문장을 진심을 다해 내뱉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버거웠던 오늘을 가만히 위로해 주는 인자한 얼굴로 말이다.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작은 것이라도 챙겨주고 돌보고 싶어 하는 이 다정한 마음이 이역만리 미국에도 있었다.
예비 대학생이 되어 한국을 떠난 이후로 처음 방문하게 되었을 때, 어떤 선물을 가져가면 좋을까 몇 달을 고민하다가 출국 전날밤 초코칩쿠키를 구웠다. 밤새 구운 쿠키들을 투명 비닐에 넣고 예쁜 리본을 달아 쇼핑백에 한가득 담아 들고 한국에 도착했다. 날아갈듯한 마음만큼 내 손도 가볍다는 걸 숙소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그날 공항버스에 남겨졌던 내 쿠키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냥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