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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걸리버

by 샤인젠틀리

계절이 흘렀고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 남아 있던 엄마와 두 동생이 미국에 입국하면서 우리의 어학연수는 어느새 이민이 되었다. 완전체가 된 우리 가족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떠나 멕시코 국경과 맞닿아 있는 텍사스 오스틴에 새 둥지를 틀었다.


주만 이동했을 뿐인데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썸터의 좁은 시골길이 늘 한적했다면 오스틴의 큰 도로엔 사람들이 보였다. 40도를 육박하는 여름날씨에 갓길인지 인도인지 헷갈리는 그 길로 사람들이 오고 갔다.


마트에서 은행에서 아파트 복도에서도 스페인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로 된 각종 안내문과 설명서에는 스페인어로 번역된 문장들이 짝꿍처럼 따라다녔다. 히스패닉 사람 한정, 영어를 못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동네였다.


스페인어라고는 문장 첫머리에 뒤집혀 붙어 있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오탈자가 아니라는 것밖에 모르는 우리 가족은 알아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네 딸들의 학교 등록을 고민하는 부모님에게 이민선배들은 자신 있게 권했다. 영어를 잘 못하니까 1년 유급해서 시간을 벌라고. 그렇게 나는 많은 이민 학생들이 그러했듯 1년을 꿇어서 다시 6학년이 되었다. 이 결정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전혀 모른 채.


나란히 유급한 둘째 언니와 나는 두 번째 전학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바뀐 게 있다면 이번에는 스쿨버스 없는 등교였다. 15분을 걸어 도착한 학교의 공기는 차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은 우리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길고 긴 여름방학을 보내고 맞이하는 새 학기 첫날이었다. 각자의 코가 석자라 누군가 챙겨줄 여유가 없는 그런 날 말이다. 이민자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또 한 명의 전학생 등장은 완벽하게 묻혔다.


미국학교에는 개학식이랄 게 따로 없었다. 홈룸(담임반)에서 출석을 체크하고 각자의 수업 스케줄표를 받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홈룸은 성 이니셜로 나뉘었는데 내가 속한 반엔 J, K, M으로 시작하는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오래 입으라며 크게 맞춰준 교복이 어색한 중1 학생처럼 이제 막 6학년에 올라온 학생들의 가방은 그들의 몸집만 했다.


가을학기로 시작하는 미국은 입학을 위한 컷오프 날짜가 9월 1일인 지역이 많았다. 나는 9월 중순에 태어나서 정상적으로 학교에 가더라도 동급생들 중에 개월수가 앞서는 상황이었다. 유급까지 감행을 하다 보니 같은 반 친구들과 체급차이가 엄청났다. 썸터에서는 앉은키만 컸는데 여기서는 그냥 거구가 되어버렸다. 어깨를 구부리고 몸을 최대한 움츠려봐도 자꾸만 대열에서 삐져나왔다.


출석을 체크하는 시간, 물 흐르듯 빠르게 J를 지나 K로 넘어왔고 잠시 정적이 흐르다 입을 연 선생님은 "이.... 윤.. 이..... 연..."을 가까스로 뱉어내다 "킴!"에서만 목소리 볼륨이 커졌다. 발음을 바로잡아줄 용기가 없던 나는 재빨리"히어~"라고 말하고 넘겨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불려지는 이름 "0000 리." 같은 반에서 처음 만나는 동양인이었다. 귓속에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가 울렸다. 물론 같은 홈룸이어도 수업스케줄은 학생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리와 홈룸 밖에서 볼일이 많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저 반가웠다.


학교는 빠르게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건물 밖에 컨테이너까지 동원해 수업 중이었고 확장공사도 한창이었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꺼내든 스케줄표 위에 알파벳 글씨들이 파도처럼 울렁였다.


당황스러움에 길치력이 최대치로 상승한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교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리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한국인이 맞지만 자신은 한국어를 거의 못한다며 부담스러워하는 소녀에게 선생님은 기어이 내 스케줄표를 건네주었다.

리의 안내로 도착한 첫 수업은 수학이었다. 나는 일찍부터 수학포기자였지만 미국에 온 이후로 얘기가 달라졌다. 한국 진도가 빠르기 때문에 썸터에서 갑자기 수학천재가 되었던 짜릿한 경험이 아직 생생했다. 쭈글쭈글해진 내 자신감을 산뜻하게 다림질하려던 계획은 수업 시작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할머니 수학선생님이 출석을 불렀고 내 이름이 호명되자 같은 홈룸에 있던 아이 한 명이 대리출석도 아니고 대리설명을 해줬다.

"얘 영어 못해요."

"뭐라고?"

날카로운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있었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온몸에 열이 올랐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수업종료 종이 울릴 때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았다.


다음 수업인 사회 교실을 찾다가 길을 잃은 나는 팔짱을 끼고 복도 벽에 기대 서 있는 어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도 짧고 빠른 그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더 도와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나는 하는 수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걸음을 옮겼다. 지각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교실에 도착한 나에게 사회선생님이 다가왔다. 그는 출석을 체크하며 내가 천 번도 넘게 연습했던 질문을 했다.

"Where are you from?"

고단함에 자꾸만 흩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난 대답했다.

"I'm Korea."

선생님은 풋하고 웃었다.

'아... 난 한국이 아니고 한국에서 온 건데.'

나는 내 바보 같은 실수가 부끄러웠고 선생님은 웃음을 터트린 게 부끄러웠는지 뒤늦게 손을 올려 입을 가렸다. 선생님의 손가락에 끼워진 큰 챔피언 반지에 고정한 눈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까닥하다간 눈물이 톡 하고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점심시간을 이만큼 기다려본 적이 있을까. 슬픈 일이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아도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법이니까 어느 때보다 점심이 절실한 타이밍이었다. 더욱이 리와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다. 긴 벤치형 식탁에 앉아 방금 사 온 따끈따끈한 브레드 스틱을 꺼냈다.


리와 친구들 사이를 오가는 대화에 전혀 참여하지 못했지만 같이 앉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고 다 괜찮았다. 한국계인 리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 되었다. 그 아이가 날 향해 무언가를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점심시간 내내 투명인간처럼 앉아있던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리가 영어로 무언가 말을 건넸다. 순간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아이들도 하나가 되어 웃었다. 뜻은 다 몰라도 놀리는 분위기가 무엇인지는 구분할 수 있었다. 테이블에서 멀리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난 더 이상 점심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세 살 때 치킨 먹으러 가출까지 했던 먹성 좋은 나는 오전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면 화장실 구석 칸에 숨어 들어가 큰 몸을 웅크린 채 점심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그런 나를 발견하지 않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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