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학교에서 난 늘 혼자였지만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만큼은 달랐다. 같은 학교 8학년인 둘째 언니와 짝꿍이 되어 함께했다.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서로에게 큰 도움 안 되는 초초급 수준이면 어떠하리, 막막함도 창피함도 나눠지면 덜 버거운 것을.
함께할 때 언니와 나는 종종 한국어로 소곤거렸는데 이 것은 꽤 중요한 의식 같은 것이었다. 부족한 언어실력과 문화 이해력 때문에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는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주위 사람들도 나 스스로도 쉽게 잊었다. 나도 할 줄 아는 언어가 있고 내 나이대 평균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창한 한국어로 모두에게 외치고 싶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에요!
일찍이 조상의 땅이었던 텍사스에 이민자로 돌아온 멕시코 친구들도 영어와 미국문화를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ESL 교실에서만큼은 분위기를 주도했다.
초록눈에 금발머리를 한 미스 맥대니엘은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목소리로, 어수선함을 돌파하며 수업을 이어나갔다.
Silencio. — “조용!”
Siéntate.— “앉아!”
영어를 배우러 간 수업이었지만 스페인어가 더욱 강렬하게 귀에 꽂혔다.
"애들은 금방 배워~"
어른들은 어린 나이에 해외생활은 식은 죽 먹기라 했지만 실상은 언제 어디로 '퍽'하고 튈지 모르는 불에 올려둔 호박죽 같았다. 언어를 익히는 과정은 더디고 개인편차가 심한 분야였다. 체류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커지는 모두의 기대 앞에서 나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모래주머니 같은 부담을 달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언니가 무심히 말했다.
"우리... 학교 가지 말까?"
누군가 해주기를 너무나 기다렸던 그 말을 나는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그래, 학교를 땡땡이 치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었다. 부모님이 타주에 볼일이 생겨서 하루 종일 집을 비울 예정이었고 언니와 나는 이날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등교하듯 집을 나와서 망을 보다가 부모님이 출발하면 집으로 들어가는 그럴싸한 계획이었다.
기다리던 그날이 왔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로 집을 나온 우리는 아파트 주차장 뒤편에 몸을 숨겼다. 등교시간이 임박해 오고 초조해진 언니는 그냥 학교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려면 언니 혼자서 가".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1교시가를 마치고 2교시가 한창일 시간인데 현관문은 열릴 기미가 안보였다. 현관문 대신 수문을 열어젖힌 하늘이 비를 쏟아부었다. 너무 갑자기라 피할 새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비와 함께 터져버린 울음을 막지 않고 목놓아 울었다. 그동안 꽉 막혀있던 마음이 시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