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털 풋볼의 설계자
축구 역사는 수많은 이름들로 대변된다. 레알 마드리드를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성장시킨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 경이로운 골 결정력을 보여준 게르트 뮬러, 스위퍼의 정석을 보여준 프란츠 베켄바우어, 득점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레프 예신 같은 인물들은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다. W-M 전술을 생각해낸 허버트 채프먼과 디나모 키예프를 이끈 빅토르 마슬로프 같은 훌륭한 감독들 또한 축구계의 큰 이름들이다. 그러나 현대 축구의 발전을 가장 크게 도운 인물은 리누스 미헬스라고 말할 수 있다. 피파는 지난 1999년에 20세기 최고의 감독으로 리누스 미헬스를 선정했고, 더 타임스 또한 그를 감독 랭킹 톱 50 중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리누스 미헬스는 정말 어떤 감독이었으며, 그의 축구를 대표하는 경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본론으로 들어가, 미헬스 리누스가 살았던 1960년대에는 굉장히 수비적인 전술이 큰 유행이었다. 특히 이탈리아 클럽들이 이를 가장 잘 구사했는데, 이들의 수비적인 축구는 전 세계에 퍼졌다. 많은 팬들은 이탈리아식 수비 축구를 축구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맞이하며 이에 만족해했다. 수비적인 축구의 패턴은 이렇다. 상대 진영에서 공을 빼앗기면 수비수들은 자기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와 최종 수비 라인을 엄청나게 낮게 내린다. 반면 공격수들은 수비에 가담하지 않고 동료 수비수들이 수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체력을 충전한다. 결국 현대 축구에서 기본적으로 보이는 압박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만약 자기 진영에서 공을 빼앗으면 공격수들과 미드필더들만이 공격을 진행하며 득점을 시도한다. 물론 풀백의 오버래핑을 사용하는 팀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수비수들은 공격 가담을 하지 않았다. 공격 - 이동 - 수비 - 이동 - 공격으로 이어지는 패턴이 수비 축구를 구사한 팀들이 보여주었던 전술이다.
반면 리누스 미헬스는 수비 축구의 팬이 아니었다. 그는 수비보다 공격을 중요시했고, 축구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그는 "수비 상황 시에도 라인을 최대한 높게 끌어올려 계속해서 압박을 한다"라는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축구 철학을 완성했다. "전원 공격, 전원 수비"로 불리는 토털 풋볼의 기본 콘셉트도 이 이론이 있었기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리헬스의 팀은 공격 - 수비 - 공격 - 수비로 이어지는 패턴을 보여주었다. 미헬스가 수비적인 축구에서 보이는 공격과 수비 사이의 이동이 굉장히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그는 압박이라는 것을 적용하며 공을 뺏긴 후 바로 수비에 들어가는 전술을 구사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수비수들을 포함해 동료 미드필더들과 공격수들이 모두 공을 뺏기 위해 움직였고, 이에 따라 최전방 라인을 계속해서 내릴 필요는 없어졌다. 아무리 기술 좋은 브라질 선수라고 해도 동시에 달려드는 세 명이나 네 명의 상대 선수들을 제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누스 미헬스는 자신의 축구와 당시 유행했던 수비 축구를 비교하며 두 전술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기존의 축구와 달리 공격적인 축구를 펼치려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당시 거의 모든 팀들이 수비를 하기 위해 자신의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간 반면, 나의 팀은 수비 시에도 라인을 후퇴시키지 않았다."
위의 그림처럼 상대 센터백이 공을 가로챘다고 가정하자. 미헬스의 축구에서는 수비 라인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위로 올라간다. 공격수와 윙어도 압박을 하고, 미드필더 또한 압박을 가한다. 반면 풀백은 압박을 하러 간 윙어의 자리를 메꾸기 오버 래핑을 한다. 센터백도 마찬가지다. 압박을 위해 위로 전진한 미드필더의 자리를 커버하기 위해 잠시 동안 중앙 미드필더 위치에 있는다. 우리는 이를 통해 토털 풋볼에서 왜 엄청난 포지션 체인지가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오프 더 볼 상황에 있는 선수들이 압박을 가하는 선수들의 원래 위치에 가기 때문이다. 또, 압박과 커버를 하지 않는 선수들도 공이 있는 지역으로 움직인다. 한 마디로 말해 공간과 지역을 중요시 하는 챌린지 앤드 커버 (Challenge and Cover)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약스의 수비수로 활약한 배리 헐쇼프는 "우리는 항상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요한 크루이프는 우리가 어디로 움직이고, 어디에 위치하고, 언제 움직이지 말아햐 할지에 대해 말했다"라고 했다.
미헬스는 자신의 이론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열 명의 필드 플레이어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상대 진영 쪽으로 전진한다. 볼을 빼앗겨도 라인을 내리지 말고 적극적인 압박을 통해 공을 다시 빼앗으려고 노력한다. 수비 시에도 공격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한다는 말이다. 라인을 후퇴시키며 수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위치에서 압박을 해야 더 공격적인 축구를 펼칠 수 있다." 필드 위에 있는 모든 선수들이 미헬스의 말처럼 라인을 내리는 대신 높은 위치에서 수비를 하고 공격을 하자 "전원 공격, 전원 수비"라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토털 풋볼이라는 말이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들과 전문가들은 미헬스의 축구가 엄청난 양의 체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헬스의 팀은 90분 내내 공격과 압박을 하기 위해 계속 뛰어다녀야 했다. 풀백들은 적극적으로 공격 가담을 해야 했고, 윙어와 공격수들은 공격뿐만 아니라 압박을 하기 위해 뛰어다녔으며, 센터백들은 영리한 움직임을 보여주며 적당한 라인 컨트롤을 해야 했다. 수비 축구를 구사하면 수비 시에는 공격수들이 쉬고 공격 시에는 수비수들이 쉬었지만, 미헬스의 축구에는 이런 유형의 체력 충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헬스는 점유율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짧은 패스와 높은 점유율로 체력을 충전하게 만들었다 (이후 그의 수제자였던 요한 크루이프는 점유율이라는 요소를 더욱 부각시키는 축구 철학으로 크루이프이즘을 탄생시켰다).
토털 풋볼의 또 다른 문제점인 취약한 뒷공간 커버는 적극적인 오프사이드 트랩의 활용으로 해결했다. 토털 풋볼이라는 축구 자체가 높은 라인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플레이다 보니 오프사이드 트랩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두 명의 센터백들이 적절한 라인 컨트롤을 하지 못해 제대로 된 오프사이드 트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미헬스의 팀은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다. 실제로 토털 풋볼을 펼치는 팀들 중 어이없게 무너지는 팀들도 많았다. 롱볼 축구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팀들은 토털 풋볼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다. 따라서 미헬스의 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선수는 요한 크루이프가 아닌 두 명의 센터백이라는 말도 있다.
다행이 위에 거론된 체력 문제와 높은 수비 라인 문제는 높은 점유율과 오프사이드 트랩의 활용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리누스 미헬스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존재했다. 이는 바로 선수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인데, 아무리 챌린지 앤드 커버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압박을 하면 필드 위의 한 쪽 측면이 텅 비게 되었다. 리누스 미헬스의 팀에 있었던 모든 선수들은 요한 크루이프처럼 천재적이지 않았으며, 가끔씩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문제점은 특히 측면에서 압박을 가할 때 많이 보였는데, 압박을 하러 오른쪽 측면으로 움직이면 왼쪽 측면이 텅 비었고, 왼쪽 측면으로 움직이면 오른쪽 측면이 텅 비었다. 선수들이 공을 가지고 있는 상대 선수 쪽으로 불규칙하게 접근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끔씩 미헬스의 팀은 동네 축구 수준의 축구를 보여주며 팬들의 마음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아리고 사키가 사키이즘을 만들기 전까지 미헬스 이후 토털 풋볼이 잠시 모습을 감춘 이유도 이 문제의 영향을 받았다.
잠시 동안 토털 풋볼의 자취를 감추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리누스 미헬스의 전술이 이론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미헬스의 선수들은 엄청난 전술 이해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따라서 선수들의 움직임은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요즘 해설위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당탕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직 한 명만이 리누스 미헬스의 축구를 완벽히 이해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선수는 요한 크루이프다. "축구화를 신은 피타고라스", "플라잉 더치맨"으로 불리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알렸던 요한 크루이프의 전술 이해도와 공간을 활용하는 움직임은 단연 압권이었다. 그는 최전방에 배치되었지만 중앙 지역은 물론 측면에서도 활동을 하며 토털 풋볼의 이론을 완벽히 이해하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헬스 감독의 모든 선수들은 요한 크루이프가 아니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리누스 미헬스가 원했던 진짜 토털 풋볼이 이루어지려면 최소 일곱 명의 월드 클래스 선수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토털 풋볼의 부정적인 면만 파고든 것 같으니 지적은 여기서 끝내고 실제 경기를 보며 미헬스가 가져온 혁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보겠다. 참고할 경기는 그 유명한 1971/1972 유러피안컵 결승전이다. 결승전에 오른 두 팀은 아약스와 인테르였는데, 아약스는 토털 풋볼을 펼치며 인테르의 빗장수비 전술인 카테나치오 전술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비록 아약스의 감독은 리누스 미헬스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미헬스가 추구했던 축구를 잘 구사했다.
아래는 아약스의 수비 라인이 굉장히 높았던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풀백들은 거의 윙어 위치에 있고, 센터백 두 명은 최종 수비 라인을 거의 하프 라인 근처까지 끌어올리며 미헬스가 추구했던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했다.
반면 수비적인 축구를 펼친 인테르의 수비 라인은 굉장히 낮았다. 또, 거의 여섯 명이 수비를 하며 최대한 실점하지 않는 경기를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딱 한 그림만 보아도 인테르 선수들이 압박을 전혀 하지 안 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약스 선수가 패스를 받았지만 인테르는 그저 수비 라인을 내릴 뿐이다. 결국 공을 잡고 있었던 아약스 선수는 측면에 위치하고 있었던 동료 윙어에게 패스를 했고, 아무런 견제 없이 크로스가 올라갔다.
만약 이 장면이 이번 시즌에 나왔다면 인테르 팬들은 TV나 컴퓨터를 부숴버렸을 것이다. 요즘은 하위 리그에 있는 팀들도 이렇게 답답한 수비를 하지 않는다. 대신 아약스처럼 라인을 높게 올리고 상대를 압박하며 수비를 한다.
경기의 첫 번째 골은 약 47분 정도에 터졌다. 골의 주인공은 요한 크루이프였지만, 우리는 골이 만들어진 과정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골은 강한 압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 아약스는 인테르 진영에서 공을 빼앗겼지만 압박을 통해 공 소유권을 다시 얻었다. 이때 아약스 선수는 크로스를 올렸고, 요한 크루이프는 페널티 박스 안에서 골을 기록했다.
결국 경기의 승자는 토털 풋볼을 완벽하게 구사한 아약스였다. 크루이프는 추가골을 기록하며 팀의 2대0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한편 수많은 언론들은 카테나치오를 완벽하게 공략한 토털 풋볼을 보고 축구의 혁신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식 수비 축구의 종말을 알리는 경기라고 보도한 언론도 있었다. 어쨌든 1971/1972 유러피안컵 결승전에서 아약스가 보여준 혁신적인 토털 풋볼은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잊지 말자. 토털 풋볼의 설계자는 리누스 미헬스다.
이미 말했다시피 점유율을 중요시하는 크루이프이즘과 조직력과 체계적인 움직임을 중요시하는 사키이즘은 토털 풋볼의 기본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리누스 미헬스의 전술이 현대 축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크루이프이즘과 사키이즘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크루이프이즘과 사키이즘만 탄생시켰나? 아니, 리누스 미헬스의 토털 풋볼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현대 전술을 탄생시켰다.
리누스 미헬스의 토털 풋볼은 혁신 그 자체였다. 축구계는 토털 풋볼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고, 미헬스가 중요시했던 압박과 점유율은 세계 축구계의 트렌드를 이끌어 가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도르트문트의 게겐프레싱이 토털 풋볼의 기본 콘셉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전술이다. 앞으로 리누스 미헬스 같은 뛰어난 감독이자 혁명가는 나오지 않을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만큼 약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이름은 거론되고 있다.
글: 프리사이스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