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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날리 Jun 02. 2021

저장을 누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AI로봇이 아니다

 

Ctrl + C, Ctrl + V 그리고 Alt + S, Alt + V



대학 리포트 과제에서 자주 이용하던 키보드 조합 키. 학교를 졸업한 뒤 회사 생활할 때 더 자주 이용하게 됐다. 복사와 붙이기, 그리고 저장하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한글이나 워드로 글을 작성할 때 수시로 저장하는 일이다. 저장하지 않은 채 일하다가, 갑자기 전기가 나가서 컴퓨터가 꺼지는 날에는 뒤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여느 날처럼, 한글파일로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다.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난 뒤였고 눈이 절로 감길 정도로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무슨 이유인지 저장을 누르지 않고 퇴근을 했나 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억할 순 없지만 분명 3/2 정도 작업하고 저장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와서 보니 3/1만 저장된 게 아닌가.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묵묵히 대답 없는 모니터 화면만 애써 계속 응시하고 또 응시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순간 두려움이 앞섰다. 대표님이 알면 어쩌나, 사수였던 대리님한테 혼나겠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조그만 가족 회사에선 소문도 부풀려지는 법이다. 내가 저지른 실수를 그냥 묻어둔 채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사단은 대표님 귀까지 들어갔고, 나는 온 직원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꾸중을 들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직원들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마감일이 정해져 있던 터라 더 그럴 수밖에. 결국 사수였던 대리님과 야근을 해서라도 남아서 작업을 해야 했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이었던 내가 저지른 작은 실수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봐야 하는 순간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원망하고 자존감이 한없이 내려갔던 것 같다.      


7년 이상 출판사에서 근무하다 보니 ‘저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요즘은 갑자기 컴퓨터가 꺼져도 다시 재부팅하면 작업 중이던 파일이 열리고 복원할 수 있어서 참 편리하다. 특히 한글파일에서 [도구-환경설정]에 들어가면, 파일 탭에서 복구용 임시 파일 자동 저장을 설정할 수 있다. 무조건 자동 저장 10분, 쉴 때 자동 저장 10초 등 편리하게 원하는 시간을 정하여 이용할 수 있다.      



반대로 수많은 투고원고를 보다가 원본을 건드리는 일도 발생한다. 그래서 항상 무슨 파일이든 복사본을 만들어서 보는 버릇이 생겼다. 옛날에는 호기심에 무심코 여닫고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더 신중하게 작업하게 되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만, 조심해서 나쁜 건 없다. 글을 쓰는 지금도 저장 단축 버튼은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사원일 때는 실수를 참 많이 했었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해왔다.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다른 사람도 나같이 어이없는 실수를 하겠지? 나는 AI 로봇이 아니다. 교정교열을 매일 밥 먹듯이 하지만, 책이 출간되고 나서도 끊임없이 나오는 게 바로 ‘오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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