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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 moon song Feb 09. 2023

딱 좋아서 하는 얼굴이잖아, 그걸 몰랐다고?

<우리는 왜 예술을>인터뷰7-(1): 영상제작자 김선영

<우리는 왜 예술을> 인터뷰

영상제작자 김선영


선자장 작업과정 촬영현장 ©️ 큰물고기미디어

*우리는 왜 예술을 경험-창작하고 매개하고 감상-하려 하는가. 질문에 답을 찾으며 세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이들은 예술 분야의 제작자들이다.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도 고화질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술이 일상에 깊숙이 들어온 지금, 예술 분야의 제작자들은 그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온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술작품은 그 존재가 작가의 창작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된다고 해야 한다. 사람들이 열광하든 철저히 외면하든 작품은 결국 사람들 속에 즉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 놓여야지만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이 없다면, 플랫폼 속에서 고를 다양한 작품들이라는 선택지도, 각각의 작품을 어떻게 선보일지 그 방법과 내용을 기획하는 일도, 심지어는 그 작품의 창작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특히나 음악 및 공연, 영상, 디자인과 같은 분야는 한 명의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거대한 협업의 과정에 가깝다. 제작자는 바로 그 협업의 과정 전체를 아울러 이끌고 보듬는다. 좋은 제작자는 원석과도 같은 작가 혹은 작품을 찾아내 독려하고 적합한 방법과 매체를 제시하기도 하고 나아가 작품을 다듬어나가는 과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키를 잡고 이끌어 작품이 사람들 앞에 빛나는 모습으로 선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작년 전 세계에 K드라마 열풍에 불을 지핀 오징어게임 역시 이전 작품의 흥행실패에도 오랫동안 묵혀둔 감독의 아이디어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제작자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한 감독의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노래, 다채로운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 속에 묻힌 작품들을 발굴하는 것도 역시 그것을 알아보고 작품화를 돕고 대중과의 만남을 연결해 주는 제작자들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어째서 그와 같은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들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는 과정이 예술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서 아이디어를 길어내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다채롭게 포착해 내는, 그리고 그것을 나누며 다른 이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예술의 자리가 다른 특별한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에 있다고 말이다.

제작자 중에서 첫 번째로 소개할 김선영은 큰물고기미디어의 대표로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문화재 관련 기록화 콘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자이자 PD이다. 서울무형문화재 장인들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난 김선영 PD는 장인들의 작품이 그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신 분이었다. 장인 선생님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담으며 호흡해 온 긴 시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순간들을 포착해 오며 장인들의 삶과 삶 속에서 숙련된 기술, 그 기술이 축적된 아름다운 작품들을 영상으로 소개해왔다. 예술가와 예술작업을 담는 작업으로 예술의 저변을 넓히고 또 그 자체로 예술작업의 저변을 넓혀온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왜 예술을 만들고 공유하고 또 항유하는가 생각해 본다.



딱 좋아서 하는 얼굴이잖아, 그걸 몰랐다고?     



안녕하세요. 제작자로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선영: 안녕하세요. 저는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프로덕션 큰물고기미디어의 대표이자 PD(영상연출가) 김선영입니다. 저희 큰물고기미디어는 방송을 비롯해서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 그리고 문화재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어요. 제가 제작한 기록영상으로는 김현곤 악기장, 김동식 선자장, 김경열 홍염장, 손대현 칠장, 정명채 나전장, 황수로 (궁중) 채화장, 단체종목 삼베 짜기, 2022년에는 임석한 불화장의 기록영상이 있습니다.     


어떻게 영상 쪽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다른 무엇이 아닌 영상을 선택하신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선영: 고등학교 때까지 제 꿈은 시인이었어요. 그러다 라디오 피디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세상이 변해가는 걸 몸으로 느낀 것 같아요. ‘아 이제 영상으로 말하는 세상이구나’. 솔직히 라디오 피디가 되는 것보다 TV 피디가 되는 길이 훨씬 더 많았고요.

그런데 3년 동안 방송사 언론고시를 준비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웃음) MBC 방송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취업 알선을 받았고, MBC를 거쳐 프로덕션에 입봉하고 나중에 제작사를 세웠죠. 영상연출 일은 자격증이나 교육과정 없이도 시작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버티기가 힘들죠. (웃음)

저는 무엇보다 기획을 하고 싶었어요. 소속되어 일을 하게 되면 소속된 곳에서 정해놓은 것들을 따라가야 해요. 스스로 기획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죠. 영상은 비디오 즉 영상의 언어와 오디오 즉 음향의 언어가 동시에 이뤄지다 보니 훨씬 복잡 다양해요. 그 말은 어떤 소재로든 제작할 수 있는 콘텐츠가 널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다양하게 제작하다 보니 하는 일도 많아졌어요.      


기획을 하는 PD로서 정체성을 갖고 계신데요, 그걸 좀 더 확장해 보면 관점을 갖고 현상을 포착하고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연출가, 제작자로서의 정체성이라고 여겨지는데, 어떠세요.

김선영: 제가 99년부터 일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피디는 곧 기획자이자 실현자였어요. 요즘은 작가들이 더 많이 기획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애초 프로그램의 선장이 피디인 만큼, 이 콘텐츠가 어떤 심도를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줄지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하는 일이 피디의 몫이었죠. 

그러다가 제작비를 이유로 VJ(Video Journalist)들이 많아지면서, 촬영까지 책임져야 하니 기획을 할 시간 자체도 없어졌죠. 전에는 촬영은 카메라 감독이, 오디오는 음향 감독이, 운전은 렌터카 기사분이 했다면, VJ로 작업할 때는 혼자 촬영, 편집, 운전까지도 혼자 다 책임지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러니 기획이나 구성을 할 시간 자체도 부족해진 거죠. 계속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데, PD로 입봉하고 10년 동안은 남들 따라가기도 급급했어요.     


제작이 쉽지 않은 환경에서 PD로 활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제작사까지 설립하게 되셨나요.

김선영: 원래는 제법 큰 제작사에 소속되어 있는 PD였어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게 되었죠. 당시 프로덕션에서 여자 PD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일을 내려놓아야 하는 뜻이기도 했어요. 실제로 일을 하다가 임신 7주 차에 하혈을 하고 실려 가기도 했고요. 응급실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내가 무슨 큰일을 한다고 뱃속의 생명까지 위험하게 하나 싶어서. 그래서 일을 자진해서 그만둔다고 했지만, 당시 제작사 대표님도 말리지는 않더군요. 그 일이 꽤나 서운한 사건이었어요. 저는 당연히 절 잡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에 당연히 이리되는구나 싶다가도, 이건 참 너무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쉬어봤어요. 그런데 집에 있으니 좀이 쑤셔서 임신 6개월이 지나면서 방송작가로 잠시 일했어요. 출산을 하고 쉬는 도중에 방송사 본사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이 왔고, 저는 기획부터 같이 할 수 있다면 하겠다고 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제작사를 하게 된 거죠.

(독립) 초반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제작사 대표들이 나이도 많고 MBC, KBS, SBS, EBS, 아리랑 TV와 같은 (방송사에서 일하던) 인하우스의 공채 PD 출신 대표들이 많았기 때문에, 외주제작사 출신에 나이도 어린 여자 PD인 저를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게다가 제작비 안에서 실제작비와 회사 수익까지 생각해야 하다 보니 이건 PD일만이 아니라 행정, 세무까지 고려하고 감당하느라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제작사를 운영했던 것 같아요. 회사를 차렸으니, 한 명 두 명 직원도 생기고, 직원들이 해야 하는 일을 만들기 위해 닥치는 대로 기획을 해야 했죠. 일 년에 약 100여 편의 기획안을 썼던 것 같아요. 다시 하라고 한다면 절대 못 할 일들을 젊다는 패기로 밀어붙였던 시간입니다.     


여러 가지 작업 중에서도 다큐멘터리로, 특히 기록화 사업이라는 문화재 관련 콘텐츠로 확장을 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김선영: 무형문화재 영상은 정말 우연히 하게 됐어요. 원래 방송 PD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방송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지겨워지는 게 있어요. 방송에 대한 염증이라고도 할까.

방송 일자는 늘 타이트하기 때문에 송출날짜에 맞춰, 촬영 · 편집 · 후반 작업이 정해져요. 더 촬영하고 싶다고 해서, 더 세밀하게 편집하고 싶다고 해서 맞춰지는 스케줄이 아니죠. 게다가 영상의 길이(RT : Running Time)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촬영내용을 재미와 시청률이라는 기준에 따라 편집해야만 하죠. 그렇게 제작을 하다 보니 애초 기획 및 준비했던 대로가 아니라, 시청자 위주로 영상을 만든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사라지는 우울감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러던 와중에 다른 제작사 대표가 함께하자고 제안한 게 무형문화재 기록영상이었어요. (국가나 시, 도 등의 지자체) 주도로 이루어지는 기록화 사업 영상작업이었죠. 기록영상의 기록본 같은 경우는 영상의 길이 제한이 없다는 점이 인상 깊었고, 기록영상 자체가 기본적으로 한 사람, 한 종목에만 집중하여 깊숙이 파고들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약간의 지적 허영심이 있는데, 계속 공부하며 영상을 진행해야 하는 점도 참 좋았어요. 피디가 작업 전 과정을 알아야 촬영감독에게 기능이 부각되도록 앵글을 요청할 수도 있고,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핵심 기능을 설명할 수도 있거든요. 다 알아야 된다는 허영심이 저랑 맞았던 것 같아요.     


대상을 깊게 이해하고 탐구하는 작업 자체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지적 허영심이라는 말로 (웃음) 겸손하게 표현하신 걸로 들립니다. (웃음) 기록영상 작업을 꽤 오랫동안 해오셨는데요. 설명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시간과 노고가 필요한 일로 여겨집니다. 지적 허영심만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웃음) 계속해서 작업하게 되는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네요. 꾸준히 해오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김선영: (생각하며) 첫 작업이 너무 좋았어서, 첫 작업에서 너무 훌륭하신 분을 만나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 만난 장인 선생님이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김현곤 선생님이에요. 김현곤 선생님은 편종·편경이라고 하는, 비인기 종목의 악기를 만드는 분이셨죠.

원래 편종편경 악기장은 종과 경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조율하는 사람을 의미했고, 실제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편종·편경이라는 악기를 만드는 데 주물장, 석공장, 소목장, 단청장, 매듭장 등의 여러 장인들이 각각의 기능으로 협업으로 만들어왔죠. 그런데 지금은 수요도 없고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다 보니 악기장이 신 김현곤 선생님이 악기를 만드는 것부터 조율하는 것까지 혼자서 다 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한여름에 조율을 위해 종도 깎고 돌도 깎으시는데, 촬영하는 스태프들 옷에 쇳가루와 돌가루가 너무 박혀서 스태프들은 우비를 입고 촬영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보호 장비라고는 안경 하나 달랑 쓰시고 작업을 하시더라고요. 존경심이 안 들면 이상할 정도였죠.

촬영하면서도 실력과 인품을 겸비하신 분이라는 걸 느꼈지만 나중에 (여러 작업을 하면서) 김현곤 선생님의 실력과 인품이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드신다고 해도 될 만한 분이셨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웃음) 편종·편경이라는 종목도 매력 있었고 사람도 사람대로 매력 있었죠.

가장 매력적이었던 건 선생님과의 인간적인 공감이었어요. 거의 촬영만 1년에 걸쳐 수십 차례 진행하는 게 기록영상인데요.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분과 교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되니까 어쩌다 저 일만 수십 년을 하시게 된 걸까?’,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시면 나의 끝없는 질문에 모든 답을 하실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장인 선생님들을 더 알고 싶어 졌고, 지금까지 하게 된 것 같아요. 게다가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제가 진행하는 몇 년 동안 최고의 기량과 최고의 인품을 가지신 문화재 보유자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악기장 선생님 다음에 만난 선생님이 합죽선 부채를 만드시는 선자장 김동식 선생님이었죠. 이분과의 호흡도 참 좋았어요. 매일 밥을 시켜 먹기 싫잖아요. 그럼 어김없이 비빔국수가 한가득 나왔어요.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가끔 비빔국수 이야기를 선생님과 합니다.

제가 PD로서 활영을 하다 보니 선생님들께 자꾸 질문이나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어요. 김동식 선생님께 선생님, 지금 이 작업 가능하실까요?”라고 (무례할 수도 있는) 기능 시연을 요구해도, 선생님께서는 된다니까~” 하시면서 보여주시곤 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선생님들은 저의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과 요구가 신이 나셨다고 해요. 그동안 다른 영상팀에게 받은 질문들에는 그렇게 세밀하게 물어봐 주는 질문이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대부분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하셨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같은 간단한 질문만 하거나 공예 과정에 대해서도 몇몇 대표적인 과정들만 묻곤 했던 거죠.

그런데 저희 기록영상 촬영에서는 재료, 소도구 제작 과정 등부터 거의 전 과정을 묻고 시연을 하셔야 하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았던 것을 이제 다 대답해 주실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자기 일에 관심을 갖는 것에 기쁜 마음으로 이야기해 주신 거죠. 그러니 저도 신이 나서, 묻고 묻고 계속 묻게 되더라고요. (웃음)      

많은 보유자 선생님들과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지만 그 많은 질문들 중 제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었어요.

선생님, 이 일이 지겹지 않으세요? 이렇게나 힘든데 얼른 도망가셨어야죠. 왜 계속하세요.”

좋으니까 하지.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 잘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이 세월까지 왔어.”

부럽습니다. 저는 이제 제 일이 정말 지겨워요.”

아닌데, 피디님 얼굴도 딱 좋아서 하는 거구만.”


제가요? 아닌데요. 저는 일이 싫은데요.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세요?”

몰랐어? 딱 좋아서 하는 얼굴이잖아? 그걸 몰랐다고?”

그 대답에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게 또 어떤 힘이 되어서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어요.

이전 19화 계속 변해야 하는 것, 완성형이 아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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