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예술을>인터뷰7-(2): 영상제작자 김선영
일을 하시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김선영: (생각하다) 장인 선생님 인터뷰를 하다 보면, 어떤 기점이 됐을 때, (웃음) 선생님들이 많이들 우세요. 장인이 된다는 게 너무 험난한 길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다가 많이들 우시는 것 같아요.
악기장 김현곤 선생님 같은 경우엔, 국가무형문화재 시험을 10년간이나 준비하시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하시다가 많이 우셨어요. 선생님이 만드시는 편종·편경의 편경은 옥을 말해요. [악학궤범] 기록과 동일하게 만들려면 남양옥이라는 것을 써야 하죠. 그런데 [악학궤범]에는 남양옥이 어디에 있는 옥인 지 나와 있지도 않고, ‘빛이 세고 맑고 청한 소리’라는 식으로 추상적으로만 서술되어 있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남양옥을 찾아서 한국도 돌아다녀 보셨고, 중국도 돌아다녀 보셨는데 중국에는 흑경 밖에 없었다고 해요. 게다가 이렇게 만들기 어려운 악기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까지 더해지는 경우도 많죠. 이 편종·편경이라는 악기가 왕실에서만 쓰는 악기인데,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조선 왕실이 없어져서 왕실도 단절되었잖아요. 그래서 한동안 만드는 사람도 없어졌고, 그만큼 복원하기도 힘들어졌죠. 선생님께서는 복원 과정에서 고생이 너무 많으셨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시면서) 서럽게 우시더라고요.
이런 모습들이 슬프기도 하고 아이같이 순박해 보이시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갖고 계신 장인으로서의 기능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에도 매료가 되더라고요. 이런 경험들이 기록영상 연출일에 더 애정을 갖게 해 준 것 같아요.
말씀해 주신 것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중에서도 작업에 영향을 주었던 일들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선영: 기록영상을 찍는 종목 중에서 판소리 같은 예능 종목은 인기도 있고 경제적인 수입도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공예 같은 경우는 몇몇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생님들의 작업 환경이 굉장히 열악해요. 많은 공방에 가보고 나서 알게 됐는데 (형편이 부족해서) 공방 없이 자신의 집에서 방 하나를 빼서 작업하시는 선생님들도 많아요. 이런 경우에는 ‘선생님이 공방 하나는 마련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영상을 만들어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촬영하게 돼요. 이런 경험들이 기록영상을 더 잘 만들어드려야겠다는 열정도 갖게 해 주었던 것 같아요. 오해를 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로 힘들게 살아오신 장인 선생님들을 뵈면서 ‘나라도 영상을 잘 만들어드려야지.’ 하는 생각. 구체적으로는 ‘그동안 아무도 초고속 카메라로 찍지 않은 거 나는 초고속 카메라로, 고화질 카메라로 찍어드려야지.’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또 장인 선생님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계속 느끼게 되는 것이 있는데, 촬영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굉장히 크시다는 거예요. 선생님들 대부분은 촬영이 다 끝나고 나면 제게 이제 자신이 다 가르쳐줬으니 저는 이수자가 되었다고 하세요. 이런 인간적인 교류가 많으니 저도 장인 선생님들을 촬영하는 것이 즐겁죠. 저희는 보통 촬영을 시작하면 아침부터 밤까지 진행하게 돼요. 모든 선생님들이 처음에는 그냥 촬영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시지만 기록영상은 아주 자세하게 찍기 때문에 사실 출연자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이죠. 그런데 열 분 중 여덟 분은 아주 즐거워하세요. 선생님들께 촬영물을 보여드리고 나면 (결과물에) 놀라시죠. (웃음) 그리고 먹을 것을 자꾸 주십니다.
저와 (촬영하면서) 가장 고생했던 분이 선자장 김동식 선생님과 홍염장 김경렬 선생님이신데, 전주에 사시는 선자장 김동식 선생님이 서울에서 전시를 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워낙 바쁘니까 전화를 안 하셨다가 막상 서울에 오니 너무 보고 싶었다고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하시니 (웃음) 전시장에 갔죠. 그리고 마침 그 전시를 보러 오신 홍염장 김경렬 선생님도 만나서 우측으로는 국가무형문화재 김동식 선생님과, 좌측으로는 서울무형문화재 김경렬 선생님과 양쪽으로 팔짱을 끼고 (웃음) 사진을 찍는데, ‘아 이분들이 (촬영이 끝나고도) 나를 싫어하시지 않는구나. 내가 그렇게 잘못하진 않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들과의 인간적인 교류도 정말 중요하구나 싶어서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또 어느 날은 제가 기록화 작업을 했던 손대현 옻칠장 보유자 선생님이 사진을 한 장 보내셨어요. 뉴욕타임지에 실린 선생님과 작품 사진이었는데 선생님은 인품도 원체 훌륭하시기도 하시지만 지금도 제게 좋은 영상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세요. 선생님께서 제게 제일 감동적인 말이라고 하신 것이 있었어요. 어떤 문화재 연구를 하는 학자가 칠장이 그냥 옻칠 바르는 기능만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힘들게 만들고, 아주 다채롭게 작품을 선보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연구하는지 몰랐다는 말을 했대요. 선생님께선 수십 년 동안 처음으로 장인으로 인정받는 감동이셨다고 하시면서 다 기록화팀 덕이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정말 보람된 일이죠. 그 보람으로 제가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저말 멋지네요. 그런데 그런 순간들 외에도 (웃음) 가장 힘들거나 속상했던 순간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김선영: 많았죠. (웃음)
특히 촬영 초반에 선생님과 기싸움이 있어요. 제가 촬영하는 선생님들 대부분이 국내 최고라고 인정을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영상팀을 종종 만나오셨던 분들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그분들이 피디처럼 ‘이건 촬영해야 해. 이건 촬영 안 해도 돼. 대충 얼른 찍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며칠만 찍고 가면 되는 영상 콘텐츠라고 생각하시죠.
그래서 촬영 시작하면서부터 팽팽하게 기싸움이 생겨요. 이때 지면 안 되거든요. ‘이건 기록영상이다’라고 몇 번씩 말씀드리고, 영상팀 없이 진행하시는 모든 작업은 재촬영해야 함을 알려드려도, 촬영날 가서 보면 이전 작업이 끝난 것도 있어요. 그럴 때 이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면 서로가 불편해지죠. 그런데 이런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져요. 오히려 촬영에 익숙해지시면, 촬영팀을 배려해 주시고, 본인이 더 세밀하게 준비해 주시고 설명해 주시게 됩니다.
오해가 있었던 적도 있어요. 어떤 장인 선생님께서는 기록영상이 굉장히 자세하게 찍기 때문에 너무 놀라 자신의 기능을 다 뺏어간다고 오해를 하셔서 촬영을 안 하겠다고 도망을 다니시기도 했어요. 또 어떤 분은 저희 기록팀을 입찰하는 업체로만 보시고, 돈을 얼마나 남기냐, 니들은 하청업체이니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하고 저의 자존심과 사명감을 바닥으로 만드셨죠. 그분 앞에서는 아니라고 이해시켰어도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진짜 나를 단지 돈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는구나 싶어서요. 뭐 그래도 시간이 지나 같이 일을 하다 보니 다 풀렸어요. 오히려, “선생님 그때 저한테 그렇게 나쁘게 말씀하셨잖아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되물으면 그때는 잘 몰랐다고 하시고 더 잘해주십니다. (웃음) 그렇지만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진 않아요.
기록화작업을 하는 영상제작자로서 본인이 맡은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선영: 무형문화재 기록영상은 장인분들의 기능 전체를 찍어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거죠. 장인분들은 도제식 교육이라고 해서 자신만의 비법을 자기 자식(이나 제자)한테만 알려주거나 아니면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아서 정확한 기록물을 남기지 않으셨어요. 공예 관련 기록물이 남아있다고 해도 (편경편종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악학궤범]과 같은 서적 정도에 규격과 같은 것들만 나와 있고 나머지는 나와 있지 않죠.
그런데 이렇게 가다 보면, 공예 같은 종목은 가장 산업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종목이라, 사라지기도 쉬워요. 예를 들면, 전통 부채 같은 건 지금 잘 쓰지 않잖아요. 요즘은 선풍기나 에어컨을 쓰지, 전통 부채라는 건 거의 장식으로 쓰이죠. 그런데 100년 정도 후에 전통 부채가, 단절되면 안 되겠지만, (장인이나 장인의 기술이) 단절되었다면 어떻게 다시 만들 수 있겠어요. 누군가가 전통 부채를 복원하려 할 때 적어도 기록영상을 보고 복원할 수 있다면 (우리 문화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진 않겠죠.
이렇게 공예 분야에서 전승이 단절되었을 경우라도 복원하려는 사람이 보고 복원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섬세하게 촬영하는 것이 기록영상입니다. 영상기록가는 전승이 단절되었을 경우 기록영상을 통해 복원 교육이 가능할 수 있도록 기록영상을 연출하고 제작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거죠. 또 기록영상은 기록용, 교육용으로 아카이빙 될 뿐만 아니라 그 공예 종목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도록 소개하는 자료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에 공예를 홍보하는 역할도 하는 셈이죠.
이야기해 주시는 에피소드들 속에서 단순히 기록을 남기는 것을 넘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기록을 하기 위해, 열정을 쏟으시는 게 말이죠. (웃음)
전통공예와 같은 경우는 특히 불편한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술작업이기도 하지만 기록화영상 작업에도 미래에 그것을 복원하거나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다면 결국 역사의 일부로 남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럼에도 기록화작업으로 전하고 싶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선영: 무형문화재 보유자 제도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다고 해요. 기본적으로 문화라는 것도 하나의 소비이니 소비자가 찾지 않는 문화는 퇴보되거나 사라지는 게 수순이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 문화라는 것은 우리만이 지킬 수 있는 무엇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바퀴처럼 연결되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비록 어떤 정황상 사라졌다고 해도, 바퀴가 돌고 돌아 필요한 시간이 될 때, 그때 쓰일 영상이 기록영상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100년 뒤에 쓰일 영상이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요. 그것이 아카이브의 힘이고요. 100년 뒤에 쓰일 것이기에 더욱 오늘을 잘 기록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과거의 예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작업하고 있는 기록영상 또한 훗날에 대한 요구를 미리 대비하는 것이죠. 오늘을 미래에 남기는 작업이라는 자부심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무형문화재의 작품들이 예전처럼 소모품으로 소비되기보다는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방향으로 가고 있잖아요. 그 예술(작품들을 만드는 과정과 예술작품들)을 기록하는 일에 이바지한다는 것에도 보람이 있죠.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