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지도를 본 적이 있는지?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다. 긴 베트남 땅덩어리에 흩어져있는 도시들을 이어주는 주요 이동수단은 바로 기차. 하노이부터 호치민까지 남북을 이어주는 기차가 달리는 남북선철도는 비공식적으로 재통일 특급(the Reunification Express)이라고도 불리며 총 연장 1,726km에 달하는 길이를 자랑한다. (위키백과 인용, "남북선 베트남철도" 참조) 남북선은 치열한 전쟁 끝에 남북을 통일한 역사를 안고 북에서 남까지 다양한 기후와 문화를 관통해 달리는 셈이다.
나는 베트남을 여행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기차를 타고 이동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야간열차를 타면 침대칸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동시에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덜컹이는 기차의 침대칸이 주는 묘미를 꼭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차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또 헤어지며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또 잠드는 일상을 보내는 것. 그 동안에도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의 흔들림을 느끼는 것. 차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바뀌어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 스쳐지나는 모든 게 아쉬울 정도로 달려나가는 그 순간을 만끽하는 것. 오래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난 후로 이따끔 그리워지곤 했었다. 눈을 감고 누우면 자장가처럼 들리던 덜컹이는 소리와 그 소리에 맞춰 흔들리던 침대칸.
나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하노이에서 사이공까지 오로지 기차로 이동했다. 여행사를 통하지도 않았고 인터넷으로 티켓을 미리 끊어놓지도 않았지만 그닥 걱정이 되지 않았다. 기차가 주요이동수단인 경우에는 구할 수 있는 표가 많고 현장의 역에서 끊는 것이 현지인과 같은 가격으로 티켓을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어를 잘 몰라도 우리에겐 와이파이가 터지는 스마트폰, 인터넷과 구글번역기가 있지 않은가. 급할 때에는 현지인들에게 정중히 도움을 요청하면 대개가 그렇듯 친절하게 도와주려 애를 썼다.
기차역으로 찾아가 현지인들이 티켓을 끊는 창구에서 다음 도시까지 침대칸을 요청하고 직원이 제시하는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면 직원은 다시 금액을 종이에 적어주었다. 그에 맞게 요금을 지불하고 티켓을 받아 제 날짜와 시간에 맞춰 기차에 오르면 끝. 호치민역에서도 나짱역에서도 직원은 티켓의 날짜와 시간, 기차의 종류에 표시를 해주며 다시 한 번 티켓 확인을 해주곤 했다. 워낙 많은 열차와 좌석종류가 있기에 그런 것이리라.
기차역에 들어서면 언제나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서는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기분을 알고 있었기에 조앤 롤링은 마법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곳을 굳이 기차역 어딘가로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개방형 플랫폼을 지나 기차에 오르면 좁고 긴 복도에 늘어선 침대칸들이 보이고ㅡ 티켓에 적힌 숫자를 찾아 걸어가며 같은 칸에는 누가 탔을지 함께 밤을 보내는 동안은 어떨지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또 설레곤 했다.
베트남에서 처음 탄 침대칸은 침대가 6개로 좌우에 3개씩 침대가 있었다. 당일 아침에 저녁표를 구하다보니 남아있는 표가 그것뿐이기도 했고 항상 침대가 4개인 쿠페칸에만 타보았기에 궁금하기도 했더랬다. 티켓에 적힌 칸에 들어서자 한쪽 침대에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남매와 역시 20대인 듯 보이는 어린 엄마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지켜보았다. 또 다른 성인 남녀가 각각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나 역시 내 자리를 확인하고 가방을 올렸다. 자리는 성인 한 명이 누울 수 있는 크기 딱 그만큼 공간뿐이었다.
아이들 엄마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러 가족들 식사를 차리느라 테이블을 점령하고 나는 침대칸이 낮아 누워서 식사를 해야할 판국이라 결국은 식당칸으로 향했다. 유난히 덜컹거리는 식당칸에서 볶음국수와 반미를 먹으며 맥주를 곁들이자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낯선 공간을 쏘다닌 하루의 피로가 서서히 풀어졌다.
다시는 6인실을 타지 않으리라 투덜대다가 차창밖으로 스쳐가는 불빛들에 홀려 한참 불빛을, 그곳의 사람들을, 그들이 사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을 보내고 나면 분명 웃으며 다시 떠올릴 것이라 확신하며 불평을 멈췄더랬다. 그리고 정말로 그 순간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다시 돌아온 침대칸은 이미 불이 꺼져있었다. 다들 잠들었을 때에는 조용히 움직이고 불을 켜지 않는 것이 예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칫솔과 치약을 꺼내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는 다시 살금살금 들어가 몸을 누였다.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뜨고 머나먼 지평선과 푸르른 대지가 넘실대는 차창밖의 풍경에 흐뭇해져 다시 눈을 감고 일부러 늦잠을 자는, 기차에서 맞는 아침.
후에역의 초가을날씨는 나짱역에 내리자 늦여름으로 바뀌었다. 가방속 깊숙이 넣어두었던 반바지와 반팔티셔츠를 꺼내입고 가방을 들쳐메고 플랫폼을 걸었을 뿐인데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후덥지근한 날씨. 기차와 함께 계절을 거꾸로 달려온 거리를 실감하는 순간.
다시 어둠을 밝히는 나짱역사로 걸어들어가 호치민으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렸다. 역사의 대기실에 앉아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는 사람들. 그 속에 끼어 어둠이 내려앉은 플랫폼을 지나 열차에 올랐다. 기차가 움직이고 나는 아주 조금 익숙해진 도시를 떠났다. 하노이에서부터 그렇게 떠나고 떠나고 또 떠났다.
남북선의 종착역 호치민에 가까워지자 지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초록이 끝없는 논을 비췄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이공역 플랫폼을 나서면서 또 다시 예감했다. 또 다시 침대칸 기차를 타고 싶어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언젠가 또 다시 침대칸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