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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pr 28. 2022

2018.3.20 / 천국과 뱃멀미 사이

케언즈,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 (Great Barrier Reef)

여행에 있어 묘미라면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일 것이다. 예를 들어 1베드를 6베드로 잘못 예약하여 텅 빈 6인실에서 나 홀로 잠을 청할 뻔한 상황이라든지, 출발지와 도착지를 거꾸로 예약하여 구글 번역기로 씨름을 해가며 외국항공사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 등 말이다. 그동안 나는 운빨에 힘입어 이러한 난관들을 제법 잘 헤쳐나갔고, 여행 도중 몸살 기운이 따라다녔던 것 말고는 특별히 탈 난 곳도 없었던 지라 스스로 여행에 있어 강한 체질이라며 으스대었다.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서 극심한 뱃멀미를 만나 관광은 고사하고 요양을 하고 오기 전까진.


사실 케언즈에서의 일정은 제법 빠듯했다. 시드니에서 1년간 살면서 퀸즐랜드에 대하여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던 나는 막연히 '멜버른 같겠거니'라는 생각으로 홀로 들떠있었다. 그러니 케언즈가 유명한 이유는 관광이 아닌 '휴양'에 가까웠다는 것을 여행 도중에야 깨달은 것이다. 호스텔에서는 동양인을 찾기가 어려웠고 혼자 온 사람은 더더욱 없었으며 다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돌아다녔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도 같던 유럽과는 달리 개헤엄조차 칠 줄 몰랐던 케언즈의 온전한 재미를 알기에는 다소 부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친구라도 한 명 데리고 왔다면 라군에서 물장구라도 치며 놀았을 텐데 혼자 밤에 돌아다니다 인종차별까지 겪은 나로서는 없는 돈을 털어 투어를 신청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혼자 온 여행이 늘 그러하듯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헛발질을 하고 마는데 이 날 나는 하마터면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는커녕 항구에서 마냥 가이드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배를 놓칠 뻔하였다. 여행에 있어서 철두철미한 준비성을 자랑하는 나는 이 날도 늦을세라 숙소에서 항구까지 가는 길을 미리 숙지해두었고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하였다. 멜버른 투어 여행처럼 가이드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가이드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붙잡고 내 바우처를 보여주며 당신이 내 가이드냐며 물어보고 다녔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분을 길바닥에서 허비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쇄해 온 바우처를 매표소에 보여주었고, 간신히 15분을 남기고 승선하였다.

Reef Fleet Terminal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다가올 뱃멀미를 예상하지 못한 채 뒤에 앉은 일본인 관광객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나보다 4살이나 어린 남자애였는데, 아르바이트로 모은 전 재산을 케언즈 여행에 쏟아부을 것이라 답했다. 왜 시드니가 아닌 케언즈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인지 묻자 그는 내게 비행기 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인들은 시드니보다는 케언즈를 선호한다고 하였고 그제야 케언즈에서 중국어만큼이나 일본어가 많이 보인 이유가 이해되었다. 우리 배의 일정은 간단한 브리핑과 함께 반 잠수정을 탑승한 후에 그린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바닥이 유리로 된 글라스 보텀 보트에 탑승하는 것이었다. 사실 투어를 예약하기 전에 꽤 많은 사전 정보를 습득한 나는 글라스 보텀 보트는 생각보다 별 재미가 없고 반 잠수정이 정말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는 후기와, 수영을 하지 못하면 스노클링은 힘들 것이라는 의견에 힘입어 반 잠수정에 꽤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예약했을 때만 하더라도 바닷속을 체험하는 기분을 상상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어느 블로그를 보아도 뱃멀미가 심할 것이라는 주의사항은 없었다. 배를 타본 것이 남이섬을 오고 가는 게 전부였던 나는 뱃멀미로 고생할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배에 승선 후 10여 분이 지나 뱃멀미가 슬슬 올라오더니 큰 배로 이동하여 그린 아일랜드로 도착할 즈음에는 속이 울렁거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바깥바람을 쐬면 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찬 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는 반잠수정에 탑승하여 15분도 채 못 버티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필이면 잠수정 안쪽으로 들어와 버린 나는 승무원이 나눠주는 검정 봉지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헛구역질을 해대며 배 위로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버텨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잠수정은 생각보다 꽤 많이 흔들렸고 이러다간 물고기고 나발이고 나부터 죽겠다 싶어 버쩍 손을 들어 SOS를 청했다.

반 잠수정 (Semi-Submarine)

남는 건 사진이라며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사진을 찍은 나는 반 잠수정 위로 올라와 간신히 속을 달래며 어서 이 체험이 끝이 나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체험은 끝이 나고 배에 다시 승선하여 점심을 먹었는데, 하필이면 뷔페 음식도 꽤 기름진 데다가 흔들리는 배 안에서 밥을 먹어야만 했기에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바로 선실로 올라와 의자에 널브러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속이 안 좋을수록 밖으로 나와 바깥공기를 흠뻑 마시며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바다를 산책하는 휴양을 즐겼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몸조차 가누기가 힘들었다. 벽에 기대어 잠을 청해보고 싶어도 미세하게 좌우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 도무지 어떤 것도 할 수 없던 나는 우선 여기서 나가자는 마음으로 배를 빠져나왔고, 배에서 보낸 30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눈앞에선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졌다.


멀미를 달래고자 무작정 걸었던 나는 그린 아일랜드를 조금 헤매다가 리조트 안쪽으로 들어가 작은 비치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내가 상상하던 휴양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날씨는 화창하였고 바다는 에메랄드빛을 뗬으며 사람들이 내는 소음마저도 평화롭게 느껴졌다. 비치타월을 한 장 깔아 해수욕장에 그대로 누워버릴까 싶다가 마침 비치체어가 하나 비어 그곳에서 요양 같은 휴양을 즐겼다. 파라솔이 필요 없을 만큼 머리 위로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앞에서는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함께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누렸다. 햇살은 적당히 따사로웠고 미풍이 선선히 불었으며 나도 모르는 새에 선잠이 들어버릴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 들자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거라 확신하였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리면 생생히 기억날 만큼. 1년간의 호주살이를 통틀어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홀로 호사를 누리다 배에 승선할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늦게나마 주변을 구경하였다. 당시만 해도 커피는 믹스커피가 제일이요, 당 떨어질 때에는 바닐라라떼에 의존하던 나인지라 호주에 와서도 호주식 커피를 크게 접할 기회가 없었다. 당시에 내가 자주 찾아가던 곳은 지금은 폐업한, 시드니 시티에 위치한 커피클럽이었다. 그곳에서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으시고는 라테에 얼음을 넣어주는 전형적인 한국식 라테를 주시고는 하는데, 나는 먼 케언즈에 와서야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넣어주는 호주식 아이스 라떼를 처음 접해본 것이다. 그것도 출국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여행에서.


다소 아쉬운 마음에 홀로 리조트를 구경하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꽤 남은 것을 보고는 다시 밖으로 나오는 길에 한눈에도 배낭여행객임을 알 수 있는 한국인이 눈에 띄었다. 타운홀만 지나가도 한국말로 심심치 않게 감탄사를 들을 수 있는 시드니에서 1년을 보낸 나는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일이 더 이상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휴양지를 혈혈단신 외로이 와보니 나도 모르는 새 그새 사람이 고파진 것이다. 당시에는 더 이상 내게 영어로 말하는 일은 새로운 설렘도 아니었거니와 영어가 마치 해내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졌고, 휴양지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함은 모국어로 풀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몇 해 전 혼자 떠난 유럽여행과는 다르게 호주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지칠 대로 지쳤던 반면 이번 여행에서는 유럽을 여행하던 그때처럼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퍽 재미있었다. 다소 짐이 단출했던 나와는 다르게 커다란 배낭을 메고 눈에는 첫 배낭여행자가 으레 그러하듯이 여행지에 대한 설렘이 가득해 보였던 H오빠와는 꽤 재미난 여행 친구가 되었다. 서로 이곳에 온 동기를 물으며 대화를 나누다 내가 워홀러라는 것을 안 오빠는 본인 역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싶었으나 사정상 취업을 하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그때의 못다 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호주로 자유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당시 워홀러 신분이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나는 내가 보낸 1년이 누군가에게는 한때의 꿈이었다는 생각에 다소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오빠는 사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내 경험을 멋있다고 말해주었고 반짝거리는 오빠의 눈을 보자니 나 스스로도 1년의 시간이 결코 소소한 경험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마치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친척지간처럼 우리는 어색함 없이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었고, 그 이후로 골드코스트에서도 좋은 여행친구가 되었다.

Green Island Jetty
유리 바닥 보트 (Glass Bottom Boat)

한껏 요양을 즐기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배가 움직이다 보니 멀미가 또다시 올라와 속이 여간 좋지 않았다. 곧바로 준비되어있던 글라스 보텀 보트에 큰 기대도 없었거니와 이대로 탔다가는 물고기를 구경하기는커녕 볼썽사납게 바다에 토를 할 지경이었다. 별 수없이 2층으로 내려가 직원분께 아무래도 뱃멀미가 심하여 아무래도 못 갈 것 같다 말하니 그분은 혹시 모르니 다음 시간대로 타라며 시간을 바꾸어주셨다. 그토록 재미가 없다고 쓰여있던 보트는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바로 눈앞에서 커다란 새가 물고기를 낚아채는 진기한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사진은 다소 흐릿하지만 실제로 보트 바닥은 물고기들을 꽤나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투명하였다. 무엇보다 좁은 공간에서 좌우로 쉼 없이 흔들리던 반 잠수정에 비하여 보트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게 해 오히려 멀미를 가라앉게 했다.


가족단위로 탑승이 가능해서인지 나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탔는데 '니모를 찾아서'에 등장하는 물고기들이 헤엄쳐 갈 때마다 아이들은 연신 '니모!' '도리!'를 외치며 까르르 웃어댔다. 그 모습에 주위 어른들도 장단을 맞춰주었고 나는 보트 유리 바닥으로 보이는 바닷속을 구경하다, 그 바다를 구경하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해사한 웃음에 나까지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던 순간이었다.


모든 일정을 소화한 후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나는 그린 아일랜드로 들어가는 부두에서 만난 일본인 한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나는 내 낯빛이 너무 안 좋아 보이자 먼저 말을 걸어주었는데, 그녀는 케언즈에서 일본인 체험학습의 가이드 겸 안전교사로 일하는 동갑내기였다. 매일같이 배를 타고 출퇴근하는 그녀도 뱃멀미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나마 한나가 건네준 약 덕분에 고생을 덜하며 돌아올 수 있었다. 한나는 나처럼 이민까지 생각하고 온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 이야기하며 느꼈던 것은 내가 느끼던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 및 갑갑함 등을 일본인인 그녀 역시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고, 한국인 다음으로 가장 의지되는 것이 일본인이더라는 내 말에 맞장구를 치는 그녀를 보자니 일본과 한국이 이웃나라가 맞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스럽던 여행이 끝나고 땅 위에 발이 닿자 이내 피곤함이 쏟아지듯 몰려왔고, 아쉬운 대로 한나와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공유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여행이 꽤나 고단했던 탓인지, 뱃멀미를 지독하게 앓은 탓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미식 거운 속을 달래고자 나이트 마켓을 찾았다. 엄마가 끓여주는 소고기 뭇국을 대신하여 쌀국수로 속을 달래고 그대로 숙소에 돌아와 몸을 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뱃멀미에 하루 종일 고생한 것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돌발 상황은 언제나 여행과 공생하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이니라. 그 덕에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내 성격에는 생각지 못할 호사를 누리고 왔으니. 비단 글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연애뿐만이 아니었음을 몸소 실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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