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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ug 10. 2021

2015.11.4 / Kindly 영국

London, United Kingdom

특별한 절기가 아니어도 사시사철 우중충하기로 악명 높은 영국을 비수기에 갔다. 그 시기에 유럽을 간다면 햇빛은 포기하라는 앞선 여행자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비수기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나에게 금전적으론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며, 평소 우중충하고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를 좋아한다는 어떤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11월의 영국에서 5일이나 머물자, 나는 비 오는 날은 어디던 좋아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사람의 기분이 날씨를 따라간다는 것을 나는 그 주에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악명 높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인상이 따스하게 남은 이유는 바로 친절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Tower of London(런던탑)

빡빡한 일정 탓에 직장인 런더너들과 함께 메트로에 오른 나는 이윽고 런던탑으로 향했다. 당시 영어에 꽤나 자신감이 생겼던 터라 매표소에서도 당당히 내가 유스 할인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고, 학생 할인뿐이라는 말에 별 수 없이 내부로 들어가 구경을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벨기에에서 SD카드를 잃어버린 탓에 상당수의 사진이 날아갔지만 당시에는 한 컷 한 컷을 소중하게 담으며 꽤나 재밌게 구경을 다녔다. 견학 온듯한 학생들 뒤로는 가이드가 런던탑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려 시도했지만 나의 리스닝 실력에 좌절하고서는 곧바로 홀로 다녔다. 비록 가이드 없이 홀로 넓은 런던탑을 돌아다녔지만, 모르는 이들과 서로 사진을 부탁하는 그 과정만으로도 퍽 행복해했다.

London Tower Bridge (타워브릿지)

그러다 런던탑 안에서 타워브릿지를 보았다. 빅벤과 런던아이를 찍을 때처럼, 나는 한동안 그 장소에서 멍하니 타워브릿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말로만 듣던 그 타워브릿지를 내 눈으로 보고 있단 사실 만으로도 벅차올랐다. 지금에서야 타워브릿지 내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워졌지만, 그 당시엔 저 풍경을 온전히 내 눈으로, 내 사진으로 담아낸 것만으로도 퍽 만족해했다. 날씨가 우중충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이 나와 속상했는데, 저 우중충한 날씨야말로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타워브릿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날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런던탑 인근 Costa Coffee

런던탑에서 나온 다음 행선지를 위해서 점심을 먹으러 Costa Coffee에 들렸다. 가이드북을 워낙에 정독한 탓에 낯익은 상표가 반가웠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에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편의점에서나 팔 법한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를 사들고 자리에 앉았는데, 영국에서 먹는 샌드위치는 사실 간식보다 일용할 양식에 가까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늘 동경해왔던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그것도 문화재를 풍경 삼아, 심지어 비록 한낱 주스와 샌드위치일지라도 주문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는 사실에 스스로 꽤 대견했다. 저 당시엔 어떻게 해서든 런던탑을 풍경 삼아 먹는 배낭여행자의 점심 한 컷을 연출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앞서 말했듯 친절한 영국의 이미지는 바로 이 코스타커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직원에게 빈 트레이를 가져다 드리며 세인트폴 대 성당으로 가는 법을 여쭈어보았는데, 잘 알아듣지 못한 나를 위하여 꽤나 천천히 그것도 성심성의껏 위치를 알려주셨다. 런던탑 인근에 위치한 커피숍에서 수도 없는 관광객들을 마주하는 입장으로서는 영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여행자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비록 설명의 5분의 1 이상을 알아듣지를 못하여 친절한 설명에 감사를 표한 후 결국 구글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구글맵으로 근처 정류장을 찾아갔는데, 정말이지 KFC 할아버지(왜인지 영국에서 만나 뵌 노신사들은 대부분 KFC 할아버지를 닮았다.)를 닮은 분과 함께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되었다. 그때 나는 분명 지도에서는 이 정류장이 맞다는데도 불구하고 버스가 당최 오지를 않아 아리송한 표정으로 안내판만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짧은 대화가 오고 갔는데 이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귀여우셨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다. 그때 나눈 대화를 간략히 말해보자면



할아버지 : 가려고 하는 곳이 어디예요?

나 : 세인트폴 대 성당이요. 제가 검색했을 땐 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라고 해서요.

할아버지 : 내 생각엔 교통에 문제가 생겨서 버스가 안 올 것 같아요.
                아래로 내려가거나 위로 올라가면 정류장이 하나가 더 있는데 거기를 이용하는 건 어때요?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시며) 나는 아직 다리가 튼튼해서 밑으로 내려가서 탈까 해요!

나 : 감사합니다!



대략 이런 정겨운 대화였다. 물론 내 모자란 영어실력에 빼먹은 말이 몇 개는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요지는 KFC 할아버지를 닮은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무릎을 귀엽게 치셨다는 것이다. 결국 노신사는 밑에 정류장으로 걸어가셨고 나는 감사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구글을 믿은 결과 결국 1분 후에 도착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구글맵을 보여드리며 1분 후에 도착한다니 같이 기다려보시자고 말씀드릴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심지어 비도 오는 날씨에 괜스레 혼자 버스를 타고 내려간 것이 죄송스러웠지만, 친절하고 귀여우신 노신사를 만나 우중충한 런던이 따스하게 기억 남을 수 있었다.


생명줄과도 같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구글맵에 의지하여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고, 성당은 외관에서부터 그 장엄한 형태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건너편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어댔고, 안에서는 종교가 오는 경건함에 가만히 성당 내부를 관찰하였다. 무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당과 절과 같은 종교 건축물에 압도될 때마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인간이 신을 향한 믿음 하나 만으로 이뤄낸 상징물이 종교가 주는 성스러움을 배가 시켰다고나 할까.


그렇게 세인트폴 대 성당을 구경 후 또다시 가이드북에 의지한 채 테이트 모던을 찾아갔다. 축소된 한 장 짜리 지도만으로 충분히 찾아갈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얼마 못가 이내 구글맵을 꺼내 들었다. 밀레니엄 브릿지를 건너가는 와중 뒤돌아 바라본 세인트폴 대 성당의 자태는 이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 광경을 보며 시간이 남으면 낮에 다시 방문할 것을 다짐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Tate modern 앞

하루 종일 걸어 다녀야 하는 배낭여행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루한 여행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로퍼를 신고 돌아다녔다. 발 아프지 말라고 신고 온 두툼한 양말 탓에 이미 신발은 여백이 없었고, 결국 앤디 워홀의 그림을 보아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 한 채 소파에 앉아 널브러졌다. 후에 테이트모던 인근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화질이 좋지 않아 꽤 속이 상했는데, SD카드를 몽땅 잃어버릴 거란 상상을 하지 못한 채 사진에 과도한 필터를 입힌 것이 그 이유였다. 퉁퉁 부은 발을 보며 가이드북이 추천하는 하루 코스는 '최대 구경할 수 있는 빡빡한 일정'이라는 것을 여행 이틀 차에 깨달았고, 런던을 다시 찾아온다면 오로지 한 달을 런던에 쏟을 만큼 여유 있는 여행을 하리라 다짐했다.


무슨 배짱에서인지, 그날은 거의 밤이 돼서야 숙소로 돌아갔는데 그만 다른 지하철역에서 내리는 바람에 한참을 헤맸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인터넷이 불통이 되는 바람에 이대로 어두운 런던 밤거리에 주저앉아 날 밤을 새야 하는 것인가 엉엉 울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주변 골목들이 기억이 날까 싶어 돌아다니다 보니 인터넷이 다시 연결됐다. 그날 숙소로 돌아와서 친절했던 시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꽤 따스했지만, 아찔했던 런던의 밤거리를 생각하니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틀 동안의 빽빽한 일정에 진이 다 빠진 나는, 그 이후 일정은 가급적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제외하고 여유롭게 다니는 것을 택했다. 화창할 때 다시 오리라 마음먹었던, 스스로 길을 찾았단 자만감에 어깨가 으쓱해져 오밤중에 길을 잃고 헤맸던 그날. 어리숙한 배낭여행자에게 친절로 답해준 두 고마운 런더너들 덕분에 그때를 회상하면 미소부터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힘들게 돌아다녔던 그 이틀이 런던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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