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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ug 13. 2021

2015.11.5 / 호그와트에서 만난 그녀

London, United Kingdom

영국에선 유독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둘째 날 만났던 두 살 어린 동생과, 넷째 날에 만났던 브라질 출신 친구, 그리고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같이 구경한 정원언니와 8할 이상을 함께 여행했다고 볼 수 있는 주이와 수연이까지. 하루에 한 명씩 새로운 사람을 사귄 거나 다름이 없는 그동안, 나는 여행이 주는 묘미는 새로움에 있다고 확신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문화,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까지. 그 하루하루가 무수히 새롭던 날들 중 호그와트에 입성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틀간의 빡빡한 일정으로 지쳐있던 나는 계획에도 없던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방문하기로 했다. 근교 여행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지만 런던 시내 밖을 벗어나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영국까지 와서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보지 않는 것은 왜인지 손해인 것만 같았다.


킹스크로스역에서 왓포드정션역으로 가는 열차는 다른 노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쾌적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아이가 꽤 귀여웠고, 흐뭇한 얼굴로 훔쳐보다 보니 어느덧 역에 도착했다. 역 앞을 설레는 마음으로 셔틀버스 안으로 들어서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동명이인인 이휘재 씨의 부인 문정원 씨와 닮은 언니는 한국인이냐는 내 질문에 반가워하며 대답했었고, 출장 차 잠깐 시간이 생겨 구경 왔다는 언니와 함께 나는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구경하게 되었다.


영국 사진이 담긴 SD카드를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아쉬운 것이 바로 이 해리포터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을 몽땅 날려먹은 것이다. 흡사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를 상상했지만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그야말로 촬영장과 촬영 소품 및 의상 등을 모아둔 박물관에 가까웠다. 외관은 마치 큰 공장을 연상시켰고, 들어가기에 전에는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관한 영상과 간략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사실 배낭여행을 오기 전에 가장 아쉬웠던 점은 영어였는데 물론 해석이 어려워도(심지어 해리포터는 힘들게 해석하면 반이 마법 용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구경하는 것에는 큰 문제는 없었으나 중간중간에 보이는 영화 장면들, 그리고 해설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언니와 나는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꽤 재밌게 돌아다녔다. 우리는 서로 편하게 사진을 찍어주고 영화 속 장면에서 보았던 촬영 소품과 의상에 대해 서로 신기해했으며, 나는 언니에게 이런 곳에서 찍는 사진은 귀여워 보여야 한다며 여행 내내 함께한 내 고깔모자를 빌려주곤 했다. 그리고 그곳은 짝을 지어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서 아무리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조차도 홀로 왔다면 뻘쭘했을 순간들이 여럿 있어 보였다. 그중 하나는, 호그와트로 향하는 열차 세트장이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길래 우리도 얼떨결에 기다렸는데, 다들 짝을 지어 열차 안에서 사진을 찍었고 다음 차례에서 기다리는 분들께 촬영을 부탁했다. 런던아이나 빅벤과 같은 큰 건축물이면 몰라도, 이렇듯 내부에서 짝을 지어 사진을 찍는 곳에 홀로 왔다면 꽤나 어색했을 터였다. 문득 내가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미리 예약하지 않은 것도 동행이 없다면 심심할 것이라는 후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9와 4분의 승강장 모형 / 해리포터 흉내 내기

다양한 촬영 소품과 의상들, 그리고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는 숱한 세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호그와트 모형이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모형을 다 둘러보려면 한 바퀴를 돌아야 할 정도의 호그와트가 영롱하게 파란빛을 내며 스튜디오를 밝히고 있었다. 앞서 보았던 모든 세트들을 잊을 만큼 그 자태가 워낙 아름다웠고, 내가 이곳에 온 것이 얼마나 장한 선택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호그와트 앞에서 모형을 올려다본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영화 속과도 같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해리포터 스튜디오' 하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그 호그와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와 정원언니는 실컷 내부를 구경한 뒤 밖으로 나와 그 유명하다던 버터맥주를 시켜마셨다. 내가 워낙 달고 짠맛을 좋아하는 초딩입맛인건지, 아니면 당시에는 '맥주의 맛은 보리다!'를 외칠 만큼 애주가가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맥주는 꽤나 맛있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맥주에 캐러멜 시럽을 잔뜩 섞은 느낌이랄까. 나는 맥주 맛에 홀딱 빠져 옷에 질질 흘릴 만큼 맥주 한 잔을 빠르게 비웠다. 쌀쌀했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언니와 나는 버터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데, 이야기의 주제는 대체로 직장이었다. 생각해보면 먼 외국까지 와서(비록 언니는 출장일지라도) 서로 직장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대화들로 언니에게 '직장인'이라는 묘한 유대감을 느꼈다. 주로 나의 한탄이 대부분이었지만.


배낭여행을 떠났을 당시에는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다. '또래들에 비해 일을 빠르게 시작했다'라는 사실은 20대 중반인 내게 적잖은 스트레스를 갖고 왔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가 어린 탓에 자잘한 실수들도 어느 정도 용납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막내로서 눈치를 보며 정세를 살펴야 하는 그 상황들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학생인 친구들이 말하는 소위 '나는 졸업하면 이런 회사에 다니고 싶어'와 내 상황이 비교가 되면서 반은 이미 실패한 느낌이 들었고, 유독 나만 빠르게 늙어가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같이 일을 시작한 친구와 홍대를 놀러 가며 홍대 늙는 기분이라는 말까지 했을까.


언니는 내가 또래들에 비해 애늙은이인 것은 사실이나 사회를 일찍 경험한 것이 이득이라 말해주었다. 그 말 한마디가 그때의 나에게는 꽤나 큰 위로가 되었다. 집 안에서도 첫째인 데다가 선천적으로 성격이 대나무와도 같은 내가 직장 밖에서 '언니'를 만나 내 속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런던으로 출장을 왔다는 언니의 상황을 퍽 멋있어했다.


직장인인 내가 싫어서 떠나고만 배낭여행. 그리고 그 여행에서 만난 멋진 직장인언니.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영국이 아닌 직장이었다. 때때로 누군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것에 힘들어한다는 사실은 꽤나 안도감을 준다. 마치 직장인이라는 것이 버거워 사표를 내고 뛰쳐나가고 싶다가도, 직장이야기에 서로 답답한 속내를 꺼내며 훌훌 털어버리는 것처럼. 그래, 드라마 미생이 큰 인기를 누린 건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작품성보다도 네가 힘든 것은 너이기에 힘든 것이 아니라는 공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적은지도 어느덧 6년이 흘렀다. 언니의 나이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어느덧 그때의 언니와 같은 30대에 도래했다. 직장인이라는 현실이 끔찍이도 싫었던 나는 어느덧 직장이 있음에 감사해하는 서른 살이 되었다. 언제나 출근길에 나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라는 꽤나 도발적인 생각을 품으며 20대의 절반을 방황하며 보냈던 나는 그때 끔찍이도 싫었던 그 경력을 발판 삼아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진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내가 출장차 갔던 여행지에서 이제 갓 24살이 된 직장인 3년 차를 만난다면 어떠한 느낌이 드려나. 그리고 나는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당시에는 언니와 내가 '직장'이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꽤나 많은 유대감을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되려 내가 그 나이가 되다 보니 언니가 나의 푸념을 잘 받아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직장이 소중해질 나이는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때 가서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을 언니는 굳이 말해주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까. 나는 언니처럼 그 어린 친구의 말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속으로 '아직 네가 더 살아봐야 알아'라는 극히 꼰대적인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먹어가야지만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그 당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나이가 지금 나와 동갑이 되었을 때, 인생을 회전목마에 빗댄 노래 제목이 이해가 간다. 세월이 무려 6년이나 지난 데다가 언니는 어쩌면 나와 함께 여행했던 사실조차 잊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만난 언니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여행에서 만난 언니의 공감은 그 후 나의 직장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꽤 든든한 위로였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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