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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ug 18. 2021

2015.11.3~6 / 나에게도 노팅힐

London, United-Kingdom

대체로 나는 비주류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제임스 맥어보이(James McAvoy)가 어느 순간 할리우드 스타가 되어버리자, 그에 대한 팬심이 조금은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내가 10년 동안 열렬히 좋아해마지않던 가수 C군 또한 당시 또래 사이에서는 팬층이 두터운 편은 아니었고, 지금 즐겨 듣는 노래의 가수 또한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세 자리를 겨우 넘어설 만큼의 비주류이다.


그러한 연유로 당시의 나는 취향이 겹치는 이를 보면 지체 없이 없이 그의 친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나와 수연이는 앞서 언급한 C군의 팬이었다는 점과 개그 코드가 잘 맞는다는 이유로 카톡을 주고받을 때조차 'ㅋ'이 난무했다. 수연이와는 두 번정도 단둘이서 시간을 보냈는데, 처음 무언가를 함께한 것은 뮤지컬이었다. 우리는 극장 근처에 바와 식당을 겸업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고, 왜인지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쭈뼛쭈뼛 들어가 자리를 안내받고는 맛있는 저녁을 함께했다.

둘이 함께한 첫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색한 기류 없이 재미나게 수다를 떨며 먹었다. 대화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날 정도의 어떤 심도깊은 대화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서로가 본 영국과 함께 먹은 음식, 곧 보게 될 뮤지컬을 이해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뮤지컬을 입장하기 전에 극장 주위를 구경해보기로 했는데, 이미 밤이 되어 어두웠고 근처에 딱히 들어갈 만한 장소도 없어 그저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여왕 폐하의 극장(Her Majesty's Theatre(The Phantom of the Opera)의 외부와 내부

우리가 본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책과 영화로도 인상 깊게 본 작품인터라 뮤지컬을 고르는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극의 서막을 알리는 'The Phantom of the Opera' 가 울려펴지자 TV로만 접했던 그 곡을 실제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표가 저렴한 탓에 배우들의 연기는 거의 볼 수 없었고 심지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무대 위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차마 허리를 숙이지도 못했다. 게다가 주 곡들이 오페라인 탓에 극의 내용을 미리 검색하고 그 전개를 유추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의 유령'을 선택한 것에는 후회가 없었다. 팬텀이 무대에서 내려올 때에는 전율이 느껴질정도로 짜릿했으며, 크리스틴이 부르는 'Think of Me'은 '목소리가 옥구슬 같다' 라는 표현을 실감하게 했다. 팬텀이 크리스틴을 데리고 자신의 지하 동굴로 데려가는 장면과 크리스틴이 결국 라울을 선택하고 마는 그 장면에서는 어떻게서든 가까이 보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하나의 대 서사극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아 뮤지컬이 끝난 후에도 각종 위키 사이트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검색해보기도 하였다. 


우리가 그 후에 만난 것은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런던을 오기 전 나는 영국여행을 좀 더 풍족하게 하기 위하여 영화 '노팅힐'을 찾아보았다. 'She~' 로 시작하는 첫 소절만 들어도 무릎을 탁 치며 아! 하고 떠오를 삽입곡과, 휴 그랜트가 줄리아 로버츠를 바라 볼때에 그 달달한 눈빛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영화 속 그들은 유난히 아름다웠고, 그가 일하는 직장이 책방인 것도 로맨틱하게 다가왔으며, 무엇보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런던의 '노팅힐' 또한 반드시 가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빡빡한 런던 일정 중에 하루를 통으로 비워 노팅힐에 죄다 쏟아붓게 되었다.

수연이와 나는 생각보다 많이 걸어 다니지는 못 했는데, 서로 발 상태가 꽤 좋지 못했고 우중충한 날씨에 돌아다니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우리는 내가 친구에게 건네받은 영국 맛집 리스트 중 노팅힐의 유명한 베이커리 가게(Ottolenghi)를 찾아가 보기로 했고 우리는 가게를 찾아다니며 노팅힐을 속속들이 구경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우중충한 날씨는 어느 정도 체념한 상태였는데, 이 날 만큼은 파스텔톤 건물들이 잿빛 하늘에 묻혀 그 자태가 가려지는 것이 다소 아쉬웠다. 영국에서는 조금만 햇빛이 들어도 모두 밖으로 나와 그 햇빛들을 만끽한다는 구절을 책에서 본 기억이 나면서, (*홍인혜 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中) 나 또한 잿빛 하늘과 연파랑, 연노랑으로 칠해진 건물들의 부조화를 보자니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Ottolenghi의 내부

마치 플랫슈즈를 팔 것만 같은 외관과는 다르게 가게 내부는 내가 상상한 영화 속 베이커리 가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좁은 입구에서 여러 사람이 계산하고자 줄을 서는 탓에 재빨리 가게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소 시장통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갖가지 디저트를 진열해 놓은 가게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통유리로 보이는 노팅힐의 풍경, 그리고 동양인은 우리뿐이었던 당시의 상황이 내가 런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우리는 조금 더 노팅힐을 둘러보다가 험악한 날씨 탓에 결국 인근 스타벅스로 자리를 잡았다. 베이커리 가게에서 갖고 온 호두파이를 조금씩 떼어먹으며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는 동갑내기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고민거리에 대해서 서로 토로하기 시작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만나 온 친구들에게서만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던 고민들은 먼 타국에서 만난 친구와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불안정한 상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온 이유, 그리고 돌아가서 각자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여행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안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서로 위안을 받았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던 그날, 우리는 주이와 함께 런던아이에 올라탄 뒤 헤어지기전에 짤막한 포옹을 나누었다. 비행기 안에서 친해졌다는 묘한 인연과, 당시 또래들에게 쉽게 보이지 않았던 C군의 팬이었다는 관심사까지. 우리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연락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나와 그 여행길을 함께해준 그녀가 여전히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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