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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Sep 01. 2021

2015.11.7~8 / 나의 X에게

Brussels, Belgium

내가 영국에서 찍은 사진 전부를 잃어버렸다고 밝히자 그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탄식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잃어버린 것은 영국과 벨기에에서 찍은 모든 사진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SD카드를 잃어버린 당시에도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날아갔다는 사실에 온 사기를 잃어버렸다. 오죽하면 그 유명한 감자튀김도 먹지 못하고 초콜릿도 겨우 선물용으로 사 들고 왔을까. 영국을 여행하면서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부쩍 솟았던 내게 보란 듯이 갖은 고난을 선물했던 벨기에, 그러나 그랑플라스의 웅장한 자태는 잊을 수 없었던 벨기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유럽여행을 준비할 당시 나는 항공권만 지른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엄두도 못 낼 40일간의 일정을 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꽤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서운 마음에 기대와 취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행복해하면서도 불안해했다. 결국 내가 유럽여행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고 출국하기 3개월 전부터 부랴부랴 일정을 세웠다. 그래서 숙소 때문에 브뤼헤와 브뤼셀을 모두 다녀올 작정이었던 벨기에를 하루밖에 줄일 수 없었고, 영국에서 브뤼셀로 향하는 유로스타 또한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차로 끊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하루만 거쳐가는 브뤼셀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라 생각하는데, 그 당시에는 늦장을 부리다 비싼 값에 이른 아침에 떠나는 기차편을 예약해둔 것이 못내 속상했었다. 6개월 전에 예약했더라면 같은 돈으로 정오 즈음으로 여유 있게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텐데. 전 날 늦잠 자면 어쩌지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알람을 맞춘 나는 주위에 피해가 갈 것 같아 별 수없이 진동으로 설정한 채 거의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일어나 조심스럽게 준비를 하고 어두운 런던 새벽 거리에서 캐리어를 끌고 가던 그날, 잃어버린 자물쇠를 찾으려 길 한복판에서 가방을 풀었다 싸기를 반복하곤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이끌고 겨우 지하철역으로 도착했다. 지금도 어찌 그 길을 홀로 씩씩하게 찾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로스타 탑승까지 성공한 나는 곧 잠에 들었다. 시간이 지난 뒤 비몽사몽한 상태로 행여 가방마저 잃어버릴까 봐 묶어뒀던 자전거 자물쇠를 간신히 푼 채 여기가 어디인지 마냥 어리둥절했고, 영국에서 자만했던 탓에 불어를 공부해오지 않은 나는 그 순간부터 멘붕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얼어서는 구글링을 통해 간신히 지하철 티켓을 끊은 나는 표를 넣는 방법도 제대로 몰라 개찰구에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간신히 숙소 인근 지하철역까지 도착했는데, 이게 웬일. 쇼핑센터와 연결된 지하철은 아무리 찾아봐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고 쇼핑센터 직원분 또한 영어가 미숙하신 탓에 당최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4바퀴를 헤매다 간신히 출구로 빠져나왔고, 별 수 없이 숙소까지 걸어갔는데 그날따라 하늘도 유독 우중충하고 거리의 분위기도 내 생각과는 못내 달라 이곳이 내가 상상하던 그곳이 맞는지 의뭉스러웠다.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겨우 숙소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는 순간 나는 곧바로 라운지 의자에 널브러졌다.


간신히 체력을 비축하곤 미로와도 같던 쇼핑센터로 다시 돌아가 피자를 사 먹으려 하는데 영어가 미숙한 탓인지 시종 젊은 종업원의 표정이 좋지를 않아 괜히 위축되었다. 간신히 주문을 마치곤 피자를 받아 들어 포크와 나이프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 별 수 없이 손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보란 듯이 다 먹고 나오려는 찰나에 코앞에 포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여기까지 와서 피자를 먹는 것이 못내 아쉬워 식당을 찾아 들어가려 했지만, 왜인지 홀로 들어가 밥을 먹을 만한 분위기의 식당은 없어 보였고, 종업원의 표정이 내내 신경 쓰이던 나는 쇼핑센터를 구경하는 둥 마는 둥 하곤 밖으로 나왔다.


굳이 들려도 되지 않았을 벨기에를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빼지 않은 이유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보았던 그랑플리스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새벽같이 이동하여 힘들게 유로스타를 타고 넘어와 밥도 피자로 때웠고 날씨도 우중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소에서 더 오래 쉬지 않고 바로 나온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구글맵으로 요리조리 골목을 빠져나오다 보니 어느덧 내가 상상하던 그 큰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압도당할 만큼 거대한 광장과 죽기 전에 꼭 한번 봐야 할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 브뤼셀 시청사. 마치 하늘에서 보면 정사각형의 상자처럼 보일 법한 그 광장 안에서 나는 몸을 빙 둘러가며 그랑플라스의 위용에 압도당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가 연신 사진을 찍어대곤 브뤼셀 시립 박물관 귀퉁이에 기대 조금 쉬어보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웬 남성분과 어깨를 부딪혔고 나는 돌바닥에 나뒹구는 핸드폰을 주어 액정이 나간 것은 아닌지 찬찬히 찾아보곤 안심했다.


그런데 이게 당최 어찌 된 일인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는데 저장할 수없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카메라앱을 종료하고 앱폴더에 들어가 보니 SD카드로 옮겨놓았던 일부 어플들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뒤 뚜껑을 열어보니 이럴 수가. 방금 부딪힌 충격으로 핸드폰이 바닥에 나뒹굴며 안에 있던 SD카드칩 또한 날아가버린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외장하드도 아니고 유심카드 옆에 나란히 꽂혀있던 마이크로 SD카드가 어찌 밖으로 튕겨져 나간 것인지는 당최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귀신이 곡 할 노릇'의 적절한 예를 들어보라면 그 순간만큼 딱 들어맞는 상황이 있을까. 순간 그간 찍은 내 영국사진들이 모조리 날아갔다는 사실에, 당황한 나머지 돌바닥을 유심히 찾아보았지만 손톱만 한 사이즈에 심지어 검은색이었던 SD카드가 보일 리 만무했다.


꼬깔모양 니트모자를 쓰고 바닥에 쭈그려 앉아 곧 눈물을 쏟을 표정으로 돌바닥을 헤지는 동양여자애가 안쓰러웠는지 나는 한 30분 동안 약 20명의 브뤼셀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한 남성분은 자신의 일인 양 안타까워하시며 나와 함께 찾아주셨지만, 나는 너무도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그만 포기하겠다며 연신 어눌한 불어로 감사를 표했다. 지나가는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나보고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셨고, 같은 아시아권에서 오신 분들 또한 도와주시려 했으며 심지어 집시들 까지도 같이 도와주시다가 찾을 수 있을 거라며 격려까지 해주셨다. (곧 나에게 소량의 유로를 원했지만, 나는 실제로 현금이 없었기에 돈 한 푼 없었다고 말씀드렸고 그녀들은 괜찮다며 곧 그 자리를 떴다.)


영국에 막 도착해 행복해하며 찍었던 백여 장의 사진이 순간 날아갔다는 사실에 나는 망연자실하여 부딪힌 그 사람을 원망하다가,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지 않은 나를 원망하다, 하늘마저 어두워 곧 비를 쏟아 내릴 것 같은 벨기에가 미워졌다. 오줌싸개동상도 보는 둥 마는 둥 했으며(그 당시 디카로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그 디카마저 곧 잃어버렸다.) 시내도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구경했고 초콜릿도 겨우 한 상자 사고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엔 벨기에에 모든 정이 떨어진 상태였고, 날씨도 을씨년스러웠으며, 아침부터 하루 종일 고생한 탓에 어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유랑에 내가 오늘 겪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올리며 동감과 위로를 구했고, 그저 침대에 몸을 뉘운 채 한 3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못다 한 빨래가 생각나서 빨랫감만을 간신히 들고 라운지로 나왔는데, 그때 낮에 보았던 한국인 관광객들을 보았고, 그녀들에게 내가 오늘 겪은 어처구니없는 일과 지금이라도 나가서 감자튀김을 먹고 오면 어떨지에 대해 물었다. 그녀들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다며 다녀오되 조심하라는 말을 해주었고, 나는 별 수 없이 야경을 포기하곤 세탁실에 자리가 날 때까지 소파에 앉아있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옆에 앉은 K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오늘 겪은 일들을 이젠 해탈한 심경으로 남 일인 듯 말했고 그는 내가 꽤 안쓰러웠는지 지금이라도 야경을 보러 가지 않겠냐며 청했다. 나는 잠시 경계하고 갈등하였으나 그가 꽤(많이) 동안인 탓에 당연히 고등학생일 거라 생각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알고 보니 우린 서로를 자신보다 연하라고 생각했고, 그는 심지어 나와 동갑이었다.

그랑플라스 (Grand Place)

나는 가이드북에서 보았다며 호기롭게 그를 안내했고, 우리는 그랑플라스 모퉁이에 자리 잡곤 함께 와플을 먹었다. 그날 바라보았던 그랑플라스의 풍경은 사뭇 달랐는데, 다소 음침한 외곽지역과는 다르게 그랑플라스만큼은 벨기에로 여행 온 많은 이들이 여전히 여흥을 즐겼고, 낡은 건물들이 빛을 받아 내뿜는 광장의 야경은 심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멍하니 야경을 바라보다 낮에 먹어봤어야 할 와플을 맛보곤, K가 낮에 와봤다던 전망 좋은 곳을 함께 구경 후 우리는 숙소로 도착했다.


다음 날, 나는 K의 도움으로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간신히 프랑크프루트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는데, 여행 오기 전 간단한 불어를 익혔다는 그는 당시 나에겐 내 인복이 내려준 하나의 결정체처럼 보였다. 독일로 향하는 기차는 북역이었던 탓에 한 낮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역 내에 운영하지 않는 상점들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나는 그날 유래일패스마저 개시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의 도움을 받아 나는 독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를 수 있었고, 그에게 너무 고마웠다며 독일로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홀로 프랑크프루트로 향했다.


난생처음으로 영어가 익숙한 언어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벨기에, 그리고 SD카드를 몽땅 잃어버리는 탓에 지금도 영국과 벨기에에서 찍은 사진이 고작 스무 장도 넘질 못 하지만 그 대신에 시민들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들이었는가를 알게 해 준 벨기에. 그리고, 한 여름밤의 꿈과도 같았던 순간들. 성수기에 감수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벨기에를 꼭 다시 들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잿빛 하늘과 우중충하던 당시 심정으론 바로 보지 못했던 그곳의 풍경과 햇살을 마음껏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K와 나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다시 만났다. 본인의 일정을 반 정도 갈아엎은 후 그는 나의 일정에 일부 동행했고, 이미 외국문화에 익숙했던 그는 입맛이 없는 나를 위하여 함께 한식을 먹어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함께 유럽의 일부를 공유했고 그 인연은 한국에서까지 이어져 그와 나는 1년가량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연애를 했다. 호주유학생이었던 그의 영향을 받아 호주에 꽤 많은 관심이 생겼던 나는 당시 한국을 몹시도 벗어나고 싶어 했기에 많은 고민 끝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했다.


이미 3개월가량 지속되었던 장거리연애, 학생과 직장인이라는 직업차이, 외국을 몹시도 갈망했던 나의 부러움과 한국과 호주 그 어디 쪽에서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신분을 체감하고 있던 그. 그는 나와 함께하고 싶어 했고 나는 나의 도전에 연애를 들여놓을 수 없었기에 철저히 그와 분리되기를 바랐다. 특별하고도 특별했던 우리의 연애에 그는 먼저 백기를 들었고 나는 별 수 없이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사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예감했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영화 <여름날 우리>를 보며, 나에게 꽤 많은 영향을 주었던 그가 더러 생각이 났다. 나도 그에게 그런 사람이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나는 그에게 꽤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와의 연애는 당시 용기가 부족했던 나를 호주로 가게끔하는 발단이 되었으며, 그와는 비록 시드니에서 만날 수 없었지만 내 인생에서 다시는 있지 못할 여러 경험과 좋은 이들을 참 많이 만났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온 나는 그때 완성된 나의 가치관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애쓰고 있다.


그랑플라스에서 넋 놓고 야경을 바라보았던 24살의 나는 어느덧 6년이 지나 서른에 도래했다. 나 역시 그에게도 꽤 빛나는 청춘이었기를 바라며 그때의 우리에게 안부를 건넨다. 나도 그에게 이미 지나간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열과 성을 다해 서로를 좋아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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