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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Mar 23. 2020

2015.11.3 / 빅벤을 보다

London, United Kingdom

용기내어 시작한 유럽여행의 시작지는 영국이었다. 영국이란 나라는 나에게 고등학교 시절 아이돌이었던 제임스 맥어보이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나라이기에 어릴 적부터 품어온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지금도 그 때 빅벤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리면 뭉클함과 전율에 온 몸이 간지러워진다. 영국은 그렇게 나에게 동경의 나라이자, 내 생에 처음 홀로 타국 땅을 밟은 기념비적인 나라로 남았다.

YHA London Central Hostel 앞

한국에서 낮밤이 바뀐 탓에 영국에서 일찍 일어난 나는 간단한 조식을 시켜 먹고는 짐을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여행의 설렘이 전날 밤 누적된 피로를 이기며, 이른 아침 호스텔 문을 열고 런던의 거리를 처음 맞닥드리던 그 순간. 앞으로 벌어질 40일간의 배낭여행을 알리던 그 아침. 연신 속으로 '숙소에서 고작 한 걸음 나왔는데도 이렇게 이쁘다니.'라는 감탄을 끊임없이 내뱉으며, 행여라 소매치기라도 만날 새라 잔뜩 긴장한 채 가방끈을 움켜쥐곤 빅벤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한국의 현대식 지하철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다소 오래돼 보이는 영국의 지하철에 낯설어했다. 호선마다 전차의 크기도 달랐던 데다가, 무엇보다 전차 안이 협소한 탓에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로 나오는 도착 안내방송을 놓칠세라 귀를 쫑긋하며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영어실력은 고작 간단한 의사표현을 할 줄 아는 4세 수준이었지만 지하철 안내방송의 리스닝 실력은 한국에서부터 다져진 내공이 있다며 애써 용기를 내보았다.

GREAT PORTLAND STREET 역
Big Ben

가이드북을 손에 꼭 쥔 채로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질 상황에 심장박동이 요동치고 있었다. 드디어 계단의 끝에서 빅벤을 마주한 순간. 그 자리에서 당장 '영국에 왔구나!!'를 외쳐댈 수 있도록 나는 극도의 흥분상태에 다 달았다. 영화에서만 보았던 그 빅벤을, 나는 언제 가볼 수 있으려나 남들의 배낭여행기를 수없이 읽으며 동경해온 그 빅벤을. 아무런 도움도 없이, 그것도 나 혼자 찾아왔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스럽고도 이 상황이 또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혼자서 들뜬 마음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다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외워 됐던 영어를 떠올려 지나가는 노부부에게 사진을 부탁드렸다. KFC 할아버지를 닮은 노신사께서는 열성적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시고는 좋은 여행이 되라며 덕담을 건넸다.


내 영어가 통했다는 설렘에 또 다른 노부부에게 사진을 요청했다. 왠지 젊은이들에게는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 겁이 나서 주로 노인분들께 여쭈어보았는데 하나같이 모두 좋은 구도를 찾아주시며 열심히 사진을 남겨주셨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벨기에에서 sd카드가 분실되는 대 참사가 벌어진 관계로 모두 날아가고 말았다.) 앞으로의 배낭여행이 성공적일 것만 같은 자신감과 홀로 해냈다는 성취감에 한동안 빅벤과 런던아이 사이를 떠나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빅벤과 런던아이를 오가는 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쉬워 시간을 붙드는 마음으로 다리 위를 서성거렸다. 지금도 빅벤을 처음 바라봤을 때의 설렘이 오롯이 기억이 난다.

국회의사당
버킹엄 궁전 옆 공원 안 연못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다 해가 더 지기 전에 다리를 건너, 버킹엄 궁전 옆에 위치한 공원에서 차갑고 맛없는 치아비타로 점심을 때우곤 여행을 이어갔다. 벨기에에서 sd카드를 잃어버린 탓에 사진이 죄다 날아간 데다 사진만 믿고 따로 기록도 해두지 않은 탓에 꽤나 많은 기억이 바래져버렸다. 지금와서 유럽여행 중 가장 후회되는 것을 고르라면 노트북을 두고 온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손과 핸드폰으로도 글짓기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에 호기롭게 공책과 펜만 챙겨와서는, 그 때의 감상을 죄다 기억할 수 있으리라 자만했다니.

내셔널 갤러리
트라팔가 광장

날씨도 우중충했던 탓에 큰 재미를 찾지 못했던 공원 투어를 끝으로, 그 유명한 내서녈갤러리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사람들을 따라서 내서녈갤러리 위로 올라가 트라팔가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에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었고, 많은 예술가들은 거리에서 공연을 했다. 이 이국스러운 광경에 고흐의 해바라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설렘과 빅벤과 런던아이처럼 말로만 들었던 그 명소에 내가 와있다는 사실이 다시 감격스러웠다.


미로와도 같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지도를 손에 꼭 쥔 채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경로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당시엔 앞으로 남은 수많은 일정을 생각해 돈을 적게 써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기념품 샵을 그냥 지나친 것에 후회가 들었다. 가이드북에서 추천해준 코스들을 무리하게 소화한 탓에 다음 도시에서 몸살이 걸려 하루치 예산을 통으로 아낀 것을 예상했더라면, 하루에 두 끼 밖에 먹지 않는 습관 때문에 꽤 돈을 남길 것을 알았더라면, 무엇보다 나는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라는 걸 그 당시에 잊지 않았더라면 고흐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수첩 하나 정도는 갖고 오지 않았을까.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업무시간 마냥 꼬박 9시간을 밖에서 보낸 나는 돌아가는 길에 Tesco Express에 들려 인스턴트 파스타 하나와 물 한 병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호스텔 라운지에서 차가운 파스타를 먹는 와중에 옆에 계시던 이탈리아 할머니께 마트의 위치를 알려드렸고, 할머니께서는 나를 어떻게 믿으셨는지 자신의 짐을 몽땅 맡긴 채 다녀오셨다. 대화를 나누던 중 내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물으셨는데 그 순간 할머니들은 어느 나라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감정이 처음이었기에 40일 동안 가장 강렬하게 기억 남은 유럽에서의 첫날. 1년이 지나 쓰던 여행기를 4년이 지나 수정하는 지금에서도 그날의 감정과 풍경들은 쉽게 휘발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첫 배낭여행의 시작이자, 3년간의 직장생활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던 그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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