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요즈음 생각지도 않게 계속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고작 해야 지난겨울 스키장에서 이틀 동안 본 사람인데 그 사람의 수줍게 웃는 모습과 긴 속눈썹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며칠간 계속 떠오르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근 6개월간 나는 그녀를 떠올리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친구 누나의 동료로 지난 겨울, 함께 스키장을 갔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갸름하지만 과중한 일 때문에 피곤해 보이는 듯한 외모였다.
누나들이어서 그랬을까? 나는 스스럼없이 누나라고 했고 틈만 나면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박장대소하기보다는 그렇게 웃으면 체통이라도 무너지는지 나직하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속눈썹이 예뻤다. 스키를 타고 같이 모여 저녁을 먹고 함께 술을 한잔 했을 때, 누나는 세안을 마치고 편한 복장으로 있었고 나는 그녀의 크고 맑은 눈과 긴 속눈썹을 보았다. 큰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가늘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움직였다.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만도 못한 속눈썹이 달린, 그 눈으로 한번 감았다 뜰 때마다 하나의 장면이 되어 내 눈동자에 박혔다.
어제까지 읽었던 '프랑스와즈 사강'의 책 때문일까? 그녀 역시 폴과 비슷한 나이였기에 나는 그녀로부터 주인공 폴의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시몽이 되어 그녀의 저 속눈썹과 긴 손가락에 입맞춤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때 나는, 그녀 앞에서 제 나이를 잊고 책에 등장하는 어린 시몽처럼 행동했을지 모른다. 그때, 그녀는 그런 모습을 수줍은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박장대소와 같은 웃음보다도 누가 볼세라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수줍게 웃는 미소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옆으로 돌린 미소 속에서 살짝 떨리는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최초로 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녀가 현재는 남자 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에서 시몽은 폴에게 재판 과정을 흉내 내며 인간의 의무인 사랑하는 일과 행복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한 죄로 그녀를 고발한다고 말한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지만 어쩌면 그때 내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그녀를 웃게 한 까닭은 그녀가 그런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였지만, 외로워 보였으며 때로는 미소 속에서도 우수가 감돌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아 있을 때도 영어 모임이 끝나고 운동을 다녀오던 길에서도 계속 그녀에 대한 생각이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녀의 속눈썹이 떠올랐고 이윽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떠올랐고 연이어 긴 손가락과 미소가 떠올랐다. 때로는 그저 한순간 스친 인연일 따름임에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이따금 마음을 헤집는 때가 있다. 내 마음임에도 내가 어찌할 수 없으며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특징적인 부분들로 분해되고 재조립된다. 마음은 인상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감정을 부여하며 전체를 시각화하고 있다. 그녀의 속눈썹에 대한 인상이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그리고 그녀의 얼굴과 손가락, 몸 전체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문득 피카소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녀를 그리게 된다면 아마 커다란 속눈썹과 검은 피부와 미소와 손가락을 중심으로 그리리라. 혹은 그녀는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하고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문득 로트렉이 그린 여인들이 생각났다. 너무 발랄하거나 밝지 않으면서 중년의 원숙함과 고독감이 함께 느껴지는 그림이 그녀에게 어울릴 법했다. 조금은 수줍게 옆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진으로 그 모습을 담아뒀더라면 좋았으리라. 혹은 내가 그 사람을 담을 예술가를 선택할 수 있다면 모딜리아니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그윽한 속눈썹의 눈과 조금은 소극적이면서 그 내면에서는 아직 어떤 불꽃이 자리하는 듯한 그 모습을 그림에 담으면 좋을 것 같았다. 측면으로는 로트렉을, 정면으로는 모딜리아니로, 그리고 부분 부분으로는 피카소적으로 그리리라. 내 상상 속에서 그녀는 많은 예술가의 연인이 되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상상이 아닌 실제로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를 상상하던 그 순간, 잊고 있던 감정이 솟아올라 어설픈 두근거림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감정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녀에게 가서 6개월 전의 어렴풋한 추억이 문득 떠올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소심하며 그녀를 곤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것은 상상의 세계에서만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진지하면서 열정적인 내 마음의 고백을 받을 때 그녀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내 이름도 알지도 못하고 아는 거라고 회사 동료의 동생 친구로만 알고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이 6개월 만에 와서,"문득 그대를 생각하고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녀는 내 열정에 감동할까? 아니면, 즉흥적인 감정에 불쾌해하며 고개를 찡그릴까? 둘 다 그녀는 저 기다란 속눈썹으로 말을 대신할 것이다. 어쩌면 폴의 마지막 말처럼 그녀는 그런 사랑을 하기에는 난 이제 늙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이 든 연애는 그렇지 않다며 속눈썹을 슬픈 듯 아래로 내리깔지도 모른다.
커피숍에서 일기를 쓰다가 나보다 열정적이며 티 없이 맑은, 그래서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한 젊은 연예인의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녀의 나이의 두 배이고 이제 자신을 늙었다고 말하며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속눈썹이 예쁜 누나를 생각했다. 나는 그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했다.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어른의 고민이 함께 있는 그 어딘가에서, 사랑을 비롯한 많은 삶의 중요한 일들에 대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주 가끔 30대 이후 내 삶의 많은 목표를 실현하지 못한 까닭이 '여자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라고 상상할 때가 있다. 가까운 이로부터 전해지는 끊임없는 신뢰와 의존은 삶의 커다란 의미가 되고 또 성공해야 할 책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의 칭찬이 좋아서 좋은 점수를 받고자 노력하는 아이나 혹은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아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는 부모의 모습처럼 말이다. 사랑을 나누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의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꽤 오랫동안 사랑을 잊고 살아온 한 남자의 상상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갖지 못한 것을 동경하며 거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돈이 없고 만나는 사람도 적지만 만족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인지 부조화에 따른 착각이 아닐까 생각을 해봐도 매일 써 놓은 것들을 다시 읽어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내 직업을 구하지 않고 이 길에 들어서면서 많은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고 돈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손에 가득 쥐고 있었을 뿐이었다. 수많은 친구, 취미활동, 그리고 아르바이트 등. 돈을 대체한 그것들로 인해 정작 바라던 '글을 쓰는 일'은 계속 소홀히 해왔던 것이다.
그런 것들에 거리를 많이 두게 되면서 이제야 진짜 해야 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작은 방과 타자기'라던 한 노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글을 쓸 수 있는 공간과 배고프지 않게 먹을 것이 있으며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이 있다. 그밖에 삶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저 양팔을 턱에 대고 지긋이 마음의 연못을 응시하면 된다. 그 심연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써 내려가면 된다.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글처럼.
글을 쓰고 있으니 상윤이가 어제 자신이 독특한 꿈을 꿨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이 두 사람을 포개 업고 빙판길을 건너다가 넘어졌는데 한 사람의 머리의 절반이 가로로 잘려나가 충격을 받았다는 꿈이었다. 나는 업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누군지 모른다고 하다가 아마도 가족인 것 같다고 했다. 잘 기억이 안 나는 것을 추측이라도 해보도록 유도한 까닭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꿈을 꾸고 나서, 내담자의 추측까지도 해석에 포함된다는 말을 보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꿈을 해석할 능력도 되지 않고 해석하려면 단시일이 아닌 충분한 시기에 거쳐 상담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시도조차 해볼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꿈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이야기를 듣게 될 때, 그에 따라 상상이 되는 여러 인상과 상징이 있으며 그것을 우리의 경험과 삶에 대입하여 해석한다. 그의 꿈이라고 그것을 못 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꿈이 심리적 압박감으로 인한 무의식의 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우리 모두 동의했다. 위험한 빙판은 흔히 삶의 고비나 위기를 상징하며 그의 험난한 취업도 언제 자빠질지 모르는 빙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시험이나 면접에서 낙방하는 것을 '미끄러지다, 넘어지다.’라고 쓰기도 하는 것처럼 이러한 동사는 빙판을 연상케 한다.
또한, 어떠한 일을 감수한다고 할 때 '안고 간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위험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거나 그렇게 하는 게 이득일 때 사용한다. 꿈에서 하나를 안기도 어려운 빙판길을 둘이나 안고 간다는 것은 무리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위험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나 혹은 안이한 생각으로 그럴 수 있다. 상윤의 성격을 고려할 때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안고 있는 두 종류가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일단 상윤이는 누군지 모르겠으나 내가 추측해보라는 말에 가족을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가족인지까지는 물어보지 않았으나 평소에 들은 바로는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마음에 상처를 받은 적이 많아서, 이들에게 애증이 있는 듯했다. 가족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한다는 상황이 딱 어울리긴 했다.
안고가는 것이 가족이라면,가족 자체라기보다 그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등의 심리적 요인인지, 가족의 빚과 같은 물질적 부담인지도 고려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가족과 관련이 없는 것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가령, 빙판길 건너에 있는 '취업의 문'을 열려고 무리해서 가져가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두 취업자리일 수도 있었다. 그 두 가지 가정 중 무엇인지는 모르나, 모두 의미하는 바는 둘을 안고 가는 것은 어려우며 둘 다 가져가다가 하나가 절단 나버릴 수 있음을 의미했다. 나는 그들 중 하나가 절단되었다는 것과 그 형태에 주목했다. '절단'이라는 것은 관계가 끝나거나 혹은 어느 하나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때 사용하는 말이다. 무엇인가가 절단 났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얼굴의 상단부가 절단되었다는 것은 그가 보았던 영화의 반영일 수도 있었다. 보통 영화에서는 목이 잘리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잔인한 영화에서는 공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얼굴의 상단부만 잘리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면 '절단'이라고 말한 상윤이의 말에 초점을 두고 그 단어가 공포 영화의 이미지를 통해 반영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절단된 부위가 가지는 의미를 두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절단된 부위는 얼굴의 상단부 즉, 뇌가 있는 쪽이다. 우리는 뇌는 지성이나 생각을 담당하며 흔히 생각이 없는 사람을 무뇌, 뇌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머리 쪽이 지성과 관계가 깊다는 것은 신화의 원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가 지독한 두통에 시달릴 때 헤파이스토스가 도끼로 그의 머리를 쪼개 그 안에서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를 꺼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혜의 신이 최고 신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머리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를 추론해보면 빙판길을 걷는 위험한 상황이나 누군가의 관계에서 그는 자신이 안고 가야 하는 두 가지의 무언가가 있다. 그 둘을 억지로라도 안고 가려고 했는데 결국 넘어지게 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이미 넘어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그들을 보니 하나는 절단나 버렸는데 그것이 어떤 일일 수도 혹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떨어진 사람이 머리가 잘렸어도 살아 있다면 어쩌면 그 사람을 상윤이 스스로 무능(무뇌)한 사람으로 여기면서도 그 생각에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그렇게 보고 있을지도 모르며 상윤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꿈을 통해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꿈이, 실현된 상황에 대하여 무의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지 또는, 앞으로 실현될지 모르는 불안감의 반영일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좀 더 깊은 면담을 통해 그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서야 알 수 있다. 지금으로선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고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심리적 압박은 취업 혹은 가족 관계의, 세분화된 측면일 수도 있으며 그 둘 전체일 수도 있다. 둘 전체일 경우 우리가 흔히 인생을 길이라 하는 것처럼 빙판길은 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삶을 춥고 외로운 빙판길로 여기며 그 길을 가는데, 가족과 취업을 등에 업은 것이다. 그리고 그 빙판길에 넘어지면 가족을 잘라버릴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머리가 잘린 것은 그가 그들을 바라보는 인식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것은 어설픈 가정일 뿐이다. 어쩌면 개꿈일 뿐이며 단지 그가 언젠가 본 소설이나 영화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해석을 시도하는 까닭은 하나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작가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처럼, 꿈을 통해 그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꿈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한 인간의 진실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의 심리를 추적해 나감에 따라,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우리의 무의식에 내재한 훌륭한 서사 구성력을 익힐 기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립 K. 딕은 자신의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자신의 꿈이나 무의식을 활용하여 작품을 완성한다.
의도치 않은 말이 때로는 큰 진실과 감동을 담듯, 이렇게 쓰인 작품 역시 커다란 진실과 감동을 전하기도 한다. 세상에 진실과 감동을 전하고픈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인간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며, 무의식으로의 접근은 이를 위한 한 가지 중요한 접근법이다.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마저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진정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