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이야기.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브라질에는 'ficar'라는 개념이 있다. 'ficar'는 관계를 정의하는 하나의 개념인데, 이 관계에서는 서로 사랑하며 아끼지만 구속하지는 않는다. 둘 사이의 섹스도 자유롭다. 특이한 점은 한 사람이 여러 명의 'ficar'를 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사귀는 거니?라고 묻는다면, 아니, 이 친구는 나의 'ficar'야,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최근에야 한국에서도 모노가미의 대안으로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특정한 아이디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자유도 물론 있다. 하지만 아이디어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것과,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삶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가 고민해가며 조심스레 적용해보는 삶을 누군가는 이미 살아가고 있다. 브라질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라다.
우리가 LAPA 지역의 문화센터에 방문했을 때 신체적으로 불편을 겪고 있는 이들을 모델로 한 패션쇼가 열리고 있었다. 비록 한쪽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의족이라도 당당하게 웃으며 자신을 뽐내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에서 위축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들과 제대로 어우러진 삶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는 어쩌면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떠들며 이들을 삶 속에서 거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선한 자극을 받은 우리는 한쪽 구석에 몰려있는 인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하나의 퍼포먼스로써 성별, 인종, 나이, 성적 지향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키스를 나누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새로운 자극 앞에 흥분했던 나는 이들과 키스를 하겠다고 나서는 해인 앞에서 굳어버렸다. 차별의 벽을 넘어보고자 기획한 이들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낯선 이들과 키스를 해보겠다고 하는 여자 친구 앞에서 드는 알 수 없는 거부감에 나는 해인을 만류했다.
나는 저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들의 생각에 공감은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도 이 땅과 문화의 산물이듯 나도 다른 곳의 영향을 받아 자라온 시간이 있다. 감상을 방해한다며 화가 난 해인과 싸우며, 스스로 꽤나 열려있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조금씩 뒤집혀갔다. 근데 해인이는 왜 나처럼 시간이 필요 없지? 그 순간만큼은 해인이를 알 수가 없었다. 저도 똑같이 나랑 한국에서 초 중 고 다 나오고 심지어 같은 대학교도 다니면서. 혼자 1년간 다녀온 세계여행에서 이미 많은 진도 차이가 나긴 했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하며 해인과 여행 중 가장 심하게 싸우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