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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Aug 15. 2020

최악의 한국음식, 최고의 한국음식

세상에 가장 맛있는 음식의 수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수와 같다.

프랑스 남자의 냉장고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고랑이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처음 고랑이의 집에 놀러 갔어요.

그가 자랑스럽게 연 냉장고 안에는 블루치즈도, 먹다 남은 와인도 아니고,'빨간 뚜껑의 플라스틱 통에 든 새빨간 김치, 찬밥 그리고 계란' 이 나란히 자리 잡아있더라고요. 고랑이와 제가 함께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제빵사 C가 고랑이에게 김치와 몇몇 한국음식을 소개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혼자 사는 프랑스 남자 집에 김치와 찬밥과 계란이라니요. 근데, 그의 말에 저는 한 번 더 빵 터졌습니다.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계란 프라이 두 개 해서 그거(김치)랑 같이 먹으면 귀찮을 때 최고야."



3년 뒤, 그 냉장고 속 김치통들은 그렇게 저희 집 김치통이 됩니다.(물김치 담긴 빨간 뚜껑들이 보이시나요?)
최악의 한국음식


그 김치통 사건 후, 저는 게맛살과 치즈를 넣은 계란말이, 명란젓, 한국' 김' 등의 반찬들과 김치찌개와 참치 젓국, 김밥 등 조금씩 한국음식들을 고랑이에게 소개해주었어요. 제가 해주는 모든 음식을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싹싹 맛있게 먹는 터라 저도 조금씩 자신감이 붙어서, 제가 먹고 싶은 메뉴로, 제 입맛으로 음식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랑이와 기내식과 각 나라 공항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고랑이:예전에 어느 공항에서 한국음식이라고 먹은 음식이 있었는데, 정말이지 맛없고, 비싸고, 최악이었어.
유자마카롱: 무슨 음식이었는데?
고랑이: 밥에 이것저것 들어간 거 같이 먹는 거... B 뭐였는데...
유자마카롱 : 비빔밥?
고랑이: 어. 그거. 진짜 내가 세상에서 먹어본 최악의 음식이었어.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아.

세상에. 뭐든 고기만 보면 쌈 싸 먹을 생각만 하고, 묵은지 맛을 아는 프랑스 남자가 그 맛있는 비빔밥이 싫다니요. 보통 외국인들이 가장 쉽고 빠르게 접하는 음식이 비빔밥이기 때문에, 저도 한국에서 외국 친구들을 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장소에 종종 데려갔고, 저에게 한국어를 배우던 학생들도 한국 음식 중 '비빔밥'을 좋아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거든요. '안 먹고 싶다' 도 아니고, 세상에서 먹어본 최악의 음식이라니요.


한국 사람으로서 좀 속이 상하기도 하고, 고랑이의 안 좋은 경험도 잊게 해 줄 겸, 그다음 날 저녁에 퇴근길에 한인 마트에 들려서 새송이와 몇몇 야채를 사서 비빔밥을 만들 준비를 하고 고랑이의 집으로 갔어요.


고랑이가 기대하지 않은 음식 중 하나였던 냉면. 날 더울 때 꼭 찾는 한국음식 중 하나예요. (깨를 도대체 누가 이렇게 잔뜩 뿌린 거지요..;;)
40도를 넘기는 아주 더운 날의 냉면과 김치만두, 그리고 아주 시원한 로제 와인 조합. 

한인 마트에 가서 모둠 나물 세트가 비빔밥 세트로 나와 있어서 잠시 망설였지만,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부지런히 밑 손질을 했어요.


새송이와 표고버섯을 볶은 뒤 마지막에 간장을 지지듯이 눌러줘서 짭조름하면서도 불맛을 살리고, 아삭아삭 오이를 채 썰고, 냉장고에 있던 김치를 숭덩숭덩 썰고, 감자와 양파와 당근을 볶아서 굴 소스 한 스푼을 넣어 향을 입히고, 깻잎을 실처럼 아주 잘게 채 썰어서 깻잎 향이 퍼지게 하고, 무생채에 아껴 쓰던 바다내음 가득한 젓갈도 넣어 살짝 매콤 새콤한 맛을 배가 되게 하고, 이곳에서는 정말 비싼 콩나물 대신 조금 더 싼 숙주나물을 조물조물 참기름과 깨소금을 곁들여 무치고...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른자가 살아있게 계란 프라이를 올려서 된장을 곁들인 양념장과 함께 비빔밥을 내갔어요. 아. 김 가루를 너무 곱지 않게 꾹꾹 눌러가며 큼지막하게 만들었고요.


최고의 음식

맛이 없을 수 없죠. 정말이지 세상에 맛없는 비빔밥은 없잖아요.

양푼에 그저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에 찬밥을 비벼도,혹은 친구들끼리 도시락 싸 와서 때려 넣듯이 양동이에 다 넣고 비벼도 맛있는 게 비빔밥인데 말이죠. 고랑이는 그날 밥을 세 그릇이나 추가해서 비빔밥을 게 눈 감추듯이 먹어댔고, 그 날 이후 비빔밥은 그에게 최악의 한국음식에서 최고의 한국음식 중 하나가 되었어요.



어제도 오래간만에 고랑이의 요청으로,그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집에 있던 냉장고 재료를 알뜰히 사용해서 만들어 보았어요. 


짜잔. 부족하지만 완성입니다. 

지난주에 세일할 때 사 온 양배추와 피망, 당근을 참치와 볶아서 도시락 반찬 쌀 겸 만들고, 요즘 호주에서 제철인 콜라비로 아삭하게 무생채를 만들고, 지난번 사 온 레디쉬로 피클을 담근 것도 꺼내고, 남은 레디시 잎 부분을 며칠 말렸다가 데쳐서 그 물로 밥을 짓고, 데친 잎을 된장과 들기름에 조물조물 무치고, 남은 쌈무와 샐러리 여린 줄기를 잘게 채를 썰고, 각종 버섯은 들깨 무침으로 준비하고,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계란 프라이와 된장과 멸치, 액젓, 참기름, 고추, 말린 버섯으로 향을 낸 양념장까지.


엄마가 늘 진물을 묻히며 손으로 일일이 깎고, 방망이로 두드려서 시골 고추장과 매실액을 넣어 절인 더덕 무침, 명절 때만 되면 밥 한 그릇 뚝딱하게 하는 고사리 무침과 아삭 쌉싸름한 도라지나물,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 맛을 알게 된 들깨가 잔뜩 버무려진 달큼한 무나물, 무말랭이무침 속에서 제가 늘 골라 먹는 매콤한 마른 고춧잎 나물, 봄에 산에서 엄마와 틈틈이 캐와서 바로 해 먹는, 산 내음이 고대로 담긴 돌나물과 씀바귀 어린잎, 겨울에 그 달큰하고, 아삭함이 더해져서 늘 입맛 다시게 하는 봄동, 집에서 안 쓰는 떡시루에 며칠간 물을 주며 키워서 먹는 그 시간을 씹고 느끼는 콩나물, 가끔 그 향이 그리워지는 방풍나물과 두릅에 새콤하게 초고추장을 올려 먹는 그 시간까지.


세상에 가장 맛있는 음식의 수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수와 같다.


저는 그 모든 한국음식에서 느꼈던 시간, 그 냄새, 결결이 살아 숨 쉬는 기억들이 자주 그립지만 참기도, 혹은 그저 그리움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 중이에요. 한국음식을 본인 나라의 음식보다 더 좋아하고 편안해하는 사람에게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일상에 제가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늘 한국음식을 만들 때는, 제가 먹은 음식 속 가장 좋은 기억과 추억을 더듬어가며 그에게 음식만으로 선물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주려고 해요. 음식은 별거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 음식은 정말이지 별거가 맞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여러분에게 최고의 한식은 무엇인가요?

저는 가끔 이 질문을 보면 이 말을 떠올리곤 합니다.


"세상에 가장 맛있는 음식의 수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수와 같다."



하루 간식으로 만들어준 비빔밥(고랑이가 좋아하는 멸치볶음과 마늘쫑 무침, 연근을 올리고 저 안에는 수란이 숨어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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