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마카롱 Sep 15. 2020

평생 먹고 살 걱정 안 할 팔자

한 15년쯤인가요. 어느 날 어머니가 이웃집 아주머니와 점을 보러 다녀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참고로 저희 어머니는 신실한 가톨릭 집안의 넷째 딸이시고, 남들 그렇듯 저희 부모님도 결혼 날짜를 잡으실 때 궁합 볼 겸 날짜 받을 겸 간 적은 있다고 듣긴 했지만, 저조차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 며칠 전에 **이네 엄마가 하도 용하다고 하는 데가 있어서 점 보러 갔는데...
유자마카롱 : 엥? 엄마 가요? 진짜? 거기서 뭐래요.
엄마: 너무 잘 맞춰서 무섭더라... 할튼, 너는 평생 먹고살 걱정 안 할 팔자래. 
유자마카롱:  아 진짜? 그 말 진짜 맘에 드네요. 근데 엄마, 엄마나 저나 가서 나쁜 소리 들으면 돈 주고 듣는 소리를 절대 무시 못 하는 새가슴 모녀이니, 그냥 우리 앞으로 가지 마요. 

그렇게 새가슴 모녀의 딸내미는 가끔 친구들이 남자 친구 언제 생기는지 물어보러 타로나 사주카페를 갈 때, 따라가면 참 신기하게도 다들 하나같이 '어디서든 잘 산다. 평생 먹고살 걱정 안 할 팔자다' 라고 하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 돈을 주고 똑같은 소리 듣겠지 싶어서 더 이상 점을 보거나 사주를 보지는 않았어요.

일본 여행 중 뽑은 대길. 덕분에 여행을 건강히 잘 다녀왔었어요.


그 잊고 살던 팔자를 처음 확인한 것은 바로 2007년 12월 31일.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즐거움과 선물을 전달해주는 봉사활동을 하다가 제 가방을 통째로 도둑을 맡게 됩니다. 정말 아르바이트를 꼬박꼬박해서 산 핑크색 아*** 전자사전부터, 핸드폰, 아끼던 카메라, 교통카드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던 고양이가 그려진 가죽 지갑까지. 제 전 재산이 다 들어있던 분홍색 가방을 잃어버리고는, 집에 어찌어찌 돌아와 저금통을 가르니 나오는 금액은 만 원 남짓이었어요. 


그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죽집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이니 괜찮다 싶지만, 임시 신분증을 신청하고 수중에 남은 돈은 점점 5천 원에서 4천 원, 4천 원에서 3천 원, 그리고 2천 원이 채 안 남아서야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2007년 마지막 날. 친구들과 맛있는 빙수도 먹고 참 즐겁게 보냈으나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오려면 2주는 더 있어야 하는데, '이번 달은 전화비와 인터넷 비도, 학자금 대출 이자도 밀리겠구나' 하며 친구가 차비하라며 빌려준 돈 2천 원으로 273번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전화를 받게 됩니다.


"XX 교수님네 과외하시는 분 맞으시죠? 혹시 저희 애 수학 과외 선생님을 찾고 있는데 XX 교수님이 추천하시더라고요. 이번 주에 혹시 상담 가능한 시간 있으신가요?"


그렇게 며칠 뒤 과외비를 받아, 친구가 빌려준 차비에 학식에서 점심을 사주며 돈을 갚았어요.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생이죠.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인생이에요. 돈이 똑 떨어질 듯하면, 아르바이트를 늘 끊임없이 소개받으며 학비를 내고 생활비를 마련했고, 돈이 모자라서 점심을 못 먹는 날에는 선배들이 지나가다 김밥 한 줄, 샌드위치 하나라도 사주셨어요. 갑자기 집에 감당 못 할 빚이 생겼을 때도 전 직장 상사의 사촌 동생들, 아르바이트하다가 만난 친구가 다니던 학원 등등 참 신기하게 각종 일자리를 소개받았고, 늘 예기치 못한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늘 친구들에게 너무 많이 받아서 어찌 갚나 싶을 때는 시사회와 음악회, 콘서트에 종종 당첨되면 친구들을 데려가서 늘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었어요. 


심지어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1주일 전에는, 집을 구하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자기가 몇 년 전에 살던 셰어하우스에서 어떤 사람이 한 달 치나 미리 돈을 내고 나갔다며 소개를 해주어 편안한 게 집이 마련된 상태로 도착해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보내기도 합니다. 학비와 생활비에 허덕일 때는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나 더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받아 학비와 집세를 밀림 없이 낼 수 있었고, 직장동료와 주변 사람들은 식비 '아껴도 잘 먹어야 한다'며 늘 먹을 것들을 챙겨주기도 했어요.


일하던 호텔 중 한 곳은, 매니저가 싸이의 '강남스타일' 노래를 듣는데, 한국 사람인 제가 나타나서 이력서를 내길래 호기심을 가져 처음으로 그 호텔 창립 이래에, 첫 한국인 직원을 뽑게 되는 등등. 저에게는 돈이 떨어지고, 집이 걱정되고, 먹을 게 없어 걱정하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는 거짓말같이 저를 어쨌든 먹고 살게 할 무언가가 나타나서 도와주고 저를 살게 해 주더라고요.



고랑이에게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고랑이는 '설마...' 하다가 이제는 믿기 시작했어요.

저와 함께면 아무리 바쁜 주차장을 가도 차를 댈 주차공간 하나쯤은 늘 생기고, 이사 갈 집이 없어 고민하는 그에게 저는 '집은 딱 좋은 때에 구해질 거야. 난 집 걱정한 적 없어.'라고 했더니 그는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웃었으나,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집으로 새 직장 출근 4일 전 이사를 마치게 됩니다. 


작년 말부터 5개월 동안, 계속되는 인터뷰와 포트폴리오, 서류를 끊임없이 작성하며 이직과 이사를 준비하다가 계약서 싸인 바로 직전 일이 틀어져서 고랑이는 엄청나게 속상해했지만 저는 '걱정하지 말아. 이렇게 안 될 일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했어요. 정말이지 그 일 이후 4주도 채 안 되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마비되었고, 만약 저와 고랑이가 그 계약서에 사인했으면 일자리는 물론, 집과 돈, 비자와 이사 문제까지 다 겹쳐 생각만 해도 얼마나 끔찍하고 가슴이 철렁한 상황이 생겼을지 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가끔은 적은 금액의 로또가 당첨되어 친구네 아이들 간식거리를 사러 가기도 하고, 유난히 좋은 호텔 레스토랑 바우처를 공짜로 받아서 동료의 송별회를 즐겁게 하기도 했으니... 아, 이틀 전에 지갑을 깜박하고 장을 보러 가는데 길에서 돈을 50불이나 주어서 장을 보기도 하고 참 저는 신기하고 운 좋은 팔자의 여자이죠.


길에서 주운 50불 덕에 장을 넉넉하게 본 날. 소주가 포즈를 취해줍니다.



저는 허리 부상으로 더 일을 할 수 없어서 직장에 퇴사하겠다고 연락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 인해 다들 휴직과 해고와 락다운이 시작되었어요. 18세 겨울 이후에 처음으로 저는 제대로 백수가 되어서야 집에서 제 손으로 제가 먹을 밥을 제대로 시간을 들여 해 먹고, 제 글을 쓰며 지냅니다. 


백수가 되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왕 글을 쓰기로 한 거, 누군가에게 따뜻하고 좋은 기운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좋은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3-4번은 6km 이상 걷기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매일 연락하기

좋은 글을 곁에 두며,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다정한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시간 가지기

정성 들여 하루에 한 번은 집밥 제대로 해 먹기

새로운 언어 매일 1시간씩 공부하기

밖에 나가 10분 이상 햇빛 쬐기

하루에 한 번은 식물들과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들을 따뜻하게 만져주기

꼭 아침저녁으로 고랑이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말하기


정말 반도 안 되는 생활비로 빠듯하게 돈을 늘 쪼개가며 지내고 있고, 수백 장의 이력서와 낙담에도 그럼에도 '먹고 살 걱정 안 한다는 팔자라니까, 걱정 말고 하루를 일단 잘 쓰는 연습을 해보자. 돈은 벌 때 되면 많이 벌려먹고 하나보다'. 하며 고랑이에게 '언젠가는 내가 버는 돈으로 너는 살림하고, 네가 갖고 싶은 페** 한 대 예쁘게 뽑아줄게. 기대해!'라고 말해봅니다.  


이렇게 쓰는 글들이 언젠가 저에게 돈을 벌게 해 준다면, 흔한 그 커플링 조차 없는 저와 고랑이에게는 작은 반지를, 엄마에게는 엄마가 좋아하는 작은 치자꽃과 천리향 화분을 선물하고, 친구들에게 받는 순간부터 기분 좋아지고, 먹으면 더욱 행복할 맛있고 예쁜 케이크 하나씩을 보내주고 싶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비숍이라는 시인은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May the future's happy hours bring you bean, rice, flower"
(27th.Apr. 1955 ,  Elizabeth Bishop)
"미래의 즐거운 시간이 당신에게 콩과 쌀과 꽃을 가져다 주기를" (1955년 4월 27일, 엘리자베스 비숍)

저는 한마디를 여기에 한 줄을 덧붙여 봅니다.


"현재의 좋은 시간이 당신에게 콩과 쌀과 꽃을 가져다 주기를" (2020년 9월 15일, 유자 마카롱)

이전 22화 엄마에게 군밤을 보내는, 단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