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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Oct 17. 2020

엄마에게 군밤을 보내는, 단밤

엄마에게 매일매일 전화하기

올해 7월부터, 저에게는 새로운 일상이 생겼어요. 바로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매일매일 전화하기'예요.매일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쯤, 운동을 하러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하곤 해요. 제가 호주로 오기 전에, 어머니께 스마트폰 쓰는 법을 3개월 동안 맞춤과외를 해드리고 왔던 터라 이젠 어머니가 아주 익숙하게 메세지와 사진은 저에게 매일 보내세요. 티브이에서 나오는 성지순례길 다큐멘터리나 어머니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공연, 영화를 찍어서 보내시기도 하고, 여름 산 가을 산에 꼭꼭 숨어있는 꽃들을 보내주시기도 해요. 아, 아주 가끔은 어머니 셀카를 보내주시기도 하는데 각도가 한치도 변함이 없어서 늘 웃게 되곤 해요.



전화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드리곤 했는데 요즘에는 거의 매일 전화를 드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 모녀의 대화는 참 별거 없어요. '아침 먹었니?', ' 엄마 김치만 드시지 말고,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같이 드세요.' , '오늘은 뭐하실 거예요?', '뒷산에 갔는데 꽃이 너무 예뻐서 보내.', '어릴 때, 논에서 메뚜기 잡을 때가 생각났어.' 등등 참 매일매일 소소하게 사는 이야기를 하곤 해요. 참, 엄마는 늘 꽃 사진, 엄마가 좋아하는 시를 정말 많이 보내주세요.


두근두근, 곧 군밤을 먹습니다!


유자마카롱: 엄마, 오늘 아침은 뭐 드셨어요?
엄마: 너 동생이 아직 안 일어나서 아침 안 먹었어. 나 혼자 밤 먹고 있어. 아주 달고 맛있네.
유자마카롱: 그죠 엄마. 한국은 요즘 밤 철이겠어요.
쪄서 드셨어요? 아니면 생밤 깎아서 드세요? 갑자기 저도 군밤 먹고 싶어요.
엄마: 어제 쪄놓은 거 반 갈라서 숟가락으로 먹고 있어.
유자마카롱: 맛있겠어요. 그래도 엄마 아침 드시려면 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요. 목 막힐 수 있으니까 물이나 우유 있으면 같이 천천히 드세요.


이렇게 글을 쓰고 나서 살펴보니, 이 대화는 그저 엄마랑 사이좋은 살가운 딸의 일상 같지만, 사실은 몇 달 전부터, 저는 한 번씩은 울 것 같은 마음을 한 번 더 붙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엄마에게 전화하고 있어요.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엄마가 연세가 드시나 보다.' 하면서도 '설마... 아니겠지' 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정년퇴임을 앞둔 마지막 달,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고 출근하시면서도 저와 손을 꼭 붙잡고 부산 여행을 잘 다녀왔었어요. 연세가 들면, 어른들이 했던 말을 또 하시고 또 하시고 하기도 하고, 워낙 엄마 인생에 날벼락 같은 순간들이 많았던 터라 사건·사고가 생기면 바로 패닉 상태가 되셔서 엄마 혈압이 떨어지지 않게 제가 어릴 때부터 체크하곤 했거든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와 약속이나 시간순서, 기억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 화장실을 보내드린 뒤 멀찌감치 떨어져 엄마가 길을 잘 찾아오는지 기다리며 확인을 하는 동안 손을 떨며 기도를 했어요.


"평생 고생한 우리 엄마, 별일 없으셔야 되요. 인생에서 여유 있게 즐기며 행복한 시간 정도는 제가 하게 해 주세요. 이것만큼은 제가 너무 늦지 않게 해 주세요."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어머니와 사 먹은 군밤. 뻥튀기 기계에서 나오는 꿀맛 군밤!


그 뒤, 호주에 돌아와서 매번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엄마는 침잠한 목소리에도 억지로 밝게 통화하고 계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어요. '늘 괜찮다, 잘 챙겨 먹고 있다, 엄마는 잘 지낸다'라는 엄마의 말에는 얼마나 많은 아무렇지 않은 척이 있었을지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저는 엄마를 참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옆에 있는 고랑이의 말로는 '너는 늘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다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해. 가장 힘든 순간 혼자 숨어서 울고...너 너네엄마 딸 맞아.' 라고 하네요.


혼자 끙끙 앓아도 혹시나 저한테 짐이 될까 싶어 병원 가는 것도 미루고 미루다 갔다 오시고, 제가 하는 국제전화에도 통화비가 많이 나오니 너무 자주 하지 말라고 자꾸 끊으라 하시고, 엄마가 결혼할 때 가져온, 저보다 더 나이 든 장롱이 너덜너덜한데도 아직도 못 버리고 늘 끌어안고 이사를 하고, 혼자 사는데 누가 보냐며 너덜너덜한 속옷을 몇십 년째 그대로 입으셔서 버렸더니 또 주워서 입으시고, 산에 다녀오시면서 동네 이웃분이 준 사탕, 떡 한 조각도 나중에 드시겠다며 끝끝내 못 버리고 냉동실에 쌓아두시고, 지난주에 엄마가 우체국에 갔던 엄마가 코로나 때문에 못 부친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셨는데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쓰여있더라고요. 

"힘들 땐, 제발 힘들다고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네 엄마잖니." 

이 모든 상황에서 가장 힘들 엄마는 여전히 자식 걱정만을 하고 계십니다.

타지에 있는 자식은 또 이렇게 죄인이 됩니다. 



엄마의 편지는 글씨만 봐도 울컥해요. 늘.
"엄마, 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모든 어머니들이 참 삶이 구비구비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어쩜 그렇게 초인적인 힘으로 견디고 이겨내며, 삶의 모진 풍파로부터 온몸으로 자식들을 지켜내시는 걸까요. 그 품속에서 따뜻하게 자란 자식으로서 저도 이제야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봅니다. 현실적으로 꼭 준비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점차 나이가 들어가는 엄마가 더 행복한 시간을 일상에서 쌓아가실 수 있도록, 엄마의 마음이 다치지 않는 대화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하기. 같은-


그래서 이렇게 오늘도 한국음식 하나를 더 만들어서 밥상을 차려 사진을 찍어서 엄마에게 보내드립니다. 늘 자식 먹는 걱정하는 엄마에게는 이 음식 사진 하나가 주는 안도감이 얼마만큼인지 알기에, 그리고 엄마와 늘 즐겁게 대화의 꼬리를 물고 갈 수 있는 '한국 음식'을 집에서 자주 하려고, 그리고 이렇게 글로 남기려고 합니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따뜻한 음식 사진과 무뚝뚝한 딸내미의 작은 이야기가 담긴 책을 꼭 선물해드리고 싶거든요. 

"엄마, 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요.


군밤

통통하고 빛깔 좋은 군밤을 물에 깨끗이 씻어준 뒤, 20분 정도 물에 담가 둡니다. 벌레 먹거나 한 밤들은 이때 물에 동동 뜨게 되니 바로 제거해주기도 좋아요. 이제 만져보면 살짝 말랑해진 밤을 건져서, 면포로 남은 물기를 제거해줍니다. 미끌미끌하면 밤 껍데기 칼집을 넣을 때 손을 다칠 수도 있거든요. 반들반들 잘 씻어준 밤을 들고, 밤의 평평한 부분에 깊지 않게 속껍질을 가를 정도로 칼집을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 길이로 넣어줍니다. 칼집을 넣는 동안 오븐을 예열해줍니다. 혹은 에어프라이어도 좋아요. 이제 칼집을 잘 넣어준 군밤을 뜨끈하게 구워줍니다. 온 집안에 따뜻한 온기와 치익-치익-토독토독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엄마랑 명동 길거리에서 눈 오는 날, 노란 털실처럼 가느다란 고구마튀김과 함께 집어 들었던 이면지로 만든듯한 군밤 봉지의 온기를, 유난히 볼이 뽀얗게 통통했던 남동생이 쓰면 귀부터 얼굴이 폭 가려졌던 털이 포실포실한 올리브색 군밤 장수 모자를, 엄마와 천 원짜리 세장을 손에 들고 기다리며, 돌돌돌 돌아가는 뻥튀기 기계에서 터져 나오는 그 구수한 군밤 냄새를, 요즘 아이들은 아마도 모를, 군밤이 구워지는 동안 새까만 연탄불의 구멍에서 반딧불이가 숨어있는 듯, 그 아주 작은 노랗고 빠알갛게 삐져나오는 연탄 불빛을 생각해봅니다. 


군밤을 구운 그릇이 꼭 판화 같아서 찍어보았어요.


집게로 밤 하나를 집어 들어 노오란 밤 속살만 살살 까서 쏘옥 꺼내어 입에 넣어봅니다. 군밤은 이 맛에 해 먹는 거죠. 아주 잘 아는 그 맛있는 맛에 한껏 기분이 좋아져 양껏 밤을 그릇에 담아 호호 불며 손으로 밤 껍데기를 까기 시작합니다. 한창 컴퓨터를 하고 있던 고랑이도 우유 한 잔을 들고 와서 옆에서 밤을 까며 한 입 두 입 먹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저희 집 맥주(고양이)는 까놓은 밤 몇 알을 본인 스낵인 줄 알고 자꾸 두리번두리번 먹을 궁리를 합니다. 오늘은 점심을 조금 늦게 먹은 터라, 이렇게 까먹는 밤이 간단한 저녁이 될 거 같아요. 


"그냥 조금만 더.. 쓰린 밤이, 내 삶이 달달했으면 했어..."(드라마 '이태원 클래스' 중 )


군밤 먹는 단밤, 그리고 달밤.


군밤 먹는 단밤, 그리고 달밤. 밤으로 시작된 두 모녀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름에 담가 둔 매실장아찌가 제법 잘 익어간다는 소식과 어제 시장 가서 사 온 더덕을 손질해서 고추장 검은깨 매실을 잘 넣고 버무린 엄마표 더덕장아찌를 냉장고에 넣었다는 이야기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엄마랑 함께 더덕 진물이 손에 잔뜩 묻어날 때까지, 더덕을 하나하나 깎고 방망이로 살짝 두드려서 고추장에 매콤 새콤하게 재운 엄마표 더덕장아찌랑 더덕구이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메뉴이거든요.  나중에 한 번, 엄마의 밥상으로 글을 한 번 써보도록 할게요.


엄마: 엄마가미안해 
유자마카롱: 엄마, 딸한테는 미안하다는 소리 하는 거 아니에요. ㅎㅎ
엄마 나 다음에 한국 가면 군밤 또 사주세요. 더덕짱아찌도 또 해주세요.^^
늘 정성이 엄마의 밥상. 제가 좋아하는 오징어순대와 더덕구이와 봄동 무침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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