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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Sep 01. 2020

퇴근길, 손에 한 봉지.

2주 전 금요일 밤.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담담하고, 침착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렇게 3일을 잠을 설치고 딱히 입맛도 없고 해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어요.


'타지에 살고 있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한국에 24시간 내에는 갈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의 준비를 늘 하며 살고 있지만, 코로나로 인해서 더 어려워진 상황에 더 큰 일이 없기만을 기도할 수밖에는 없더라고요. 그런 저를 말없이 지켜만 보던 고랑이. 3일째 되는 날, 그는 토끼 눈을 한 채 계속 몇 시간을 울던 저의 손을 붙잡고 일으킵니다.

"나가자. 햇빛도 좀 보고, 장도 보고 너 좋아하는 과일도 사러 가자."

그렇게 도착한 야채 과일 가게에는 요즘 이곳에서 제철인 블루베리,

보석같이 알알이 빛나면서도 요란하지 않게 인사를 하는 체리,

색깔은 곱지만, 소쿠리에 담겨 그 향이 더 진한 한국 딸기를 더욱더 그립게 하는 딸기,

제주도 시장에서 본 한라봉만큼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사 들고 오면 행복한 탄젤로,

외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가 탁자 밑에 몰래 숨겨두었다가 제 손에 쥐여주시면 그 향에 킁킁거렸던 살구,

세일할 때면 가장 행복한 얼굴로 잔뜩 담게 되는 골드키위,

근처에서부터 그 향기에 달콤한 오동통함에 바로 집어 들게 되는 매력인 망고,

한국에서 친구들이 사진을 올릴 때마다 입맛을 다시곤 하지만 아직 너무 비싸서 못 먹는 뽀얀 빛깔의 복숭아,

똑똑 두드려보다가 쫘악 쪼개서 입안 가득 시원하고 달큼한 여름의 향을 늘 즐겁게 해주는 수박까지.


그렇게 한참 구경을 하다가 장바구니에 요즘 가장 싼 딸기 한 팩과 블루베리 한 팩을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제가 좋아하는 망고 몇 개, 제일 좋아하는 체리도 한 움큼 크게 쥐어서 사 오고 싶었지만, 그 비싼 가격에 도저히 집어 들 수는 없더라고요. 그렇게 바깥 공기를 쐬고 집으로 돌아와 앉아있는데, 고랑이가 사 온 블루베리 한 팩을 깨끗한 물에 잘 씻어서 제가 좋아하는 과일 컵에 담아서 가져왔어요. 한 알 한 알 손으로 집어서 먹다가 한꺼번에 몇 알을 입안 가득 물어보기도 합니다. 타닥타다닥- 블루베리 몇 알이 입안 가득 터지는 소리와 그 향에 위로를 청해 보았어요.

요즘 참 싸고 맛있는 이곳의 블루베리. 입안 가득 토토독 터지는 그 맛.

그러고는 며칠 뒤, 출근한 고랑이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날 아침, 서로 서운한 마음에 조금 말다툼을 하고 출근을 했던 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전화하는데, 전화 신호음만 가더라고요. 그러다가 소주와 맥주가(고양이들) 쪼르륵 문가를 향하길래 쳐다보니 차 소리와 함께 고랑이가 들어옵니다. 웬 봉지 하나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오는 고랑이. 평소에 워낙 미사여구가 없는 고랑이라 그저 봉지를 건네줍니다.봉지를 열어보니 며칠 전 비싸서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은 망고와 골드키위 서너 개가 들어있었어요.

"너 좋아하는 체리가 없더라. (골드) 키위 몇 개랑 같이 샀어."

아마도, 제가 비싸다고 들었다가 다시 갖다 둔, 못 사 먹은 과일이 못내 마음이 걸렸나 보더라고요. 평소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잘 못 하는 그가 제가 좋아하는 과일을 한 봉지 건네주는 그 의미를 저는 잘 알고 있고요.


퇴근길, 손에 한 봉지

문득, 정말 무뚝뚝해서 늘 말이 없던 아빠가 가끔 퇴근길에 사 온 한 봉지들을 생각해봅니다.


기름이 종이 한가득 묻은 통닭 한 봉지, 까만 봉지에 든 귤 한 봉지, 적당히 불은 떡볶이 한 봉지, 이것저것 다 담긴 빵 봉지, 끝이 살짝 눌린 꽈배기 한 봉지, 조금은 식은 붕어빵이나 뜨끈한 군고구마 한 봉지, 꿀이 삐져나온 호떡 한 봉지.


퇴근길, 그 손에 든 한 봉지를. 가끔은 한잔을 걸치고 들어와서 건네시는 그 한 봉지를- 생각해봅니다

고랑이가 사 온 과일을 예쁘게 담아봅니다.
저만을 위한 골드키위도 담아봅니다.
좋아하는 제철 과일을 양껏 한입 가득 베어 무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면,
좋아하는 제철 과일을 나눠 먹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요?


돈이 없던 시절, 일 끝나고 집어 든 복숭아 두 개. 언젠가는 돈을 벌어 복숭아 한 봉지를 크게 퇴근길에 사겠다고 맘먹곤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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