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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Aug 31. 2020

세 번은 끓여야 소고기 무국

겨울무는 보약이란다

어렸을 적, 저에게 일 년 중 두 번째 신나는 날은 조금은 황당하게도, 바로 김장하는 날이었어요. 엄마가 김장을 매년 직접 하셨기 때문에, 하루 종일 엄마와 붙어서 김치 하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김장하는 날에는 늘 어머니가 수육을 넉넉히 하셨거든요. 전날 밤 절여둔 배추의 물기를 빼는 동안, 엄마는 엄마표 비밀 육수에 아주 푹 익힌 돼지고기를 면포로 모양을 잡아둔 뒤, 두꺼운 나무 도마를 올려두며 식혀두곤 하셨어요. 엄마의 김장 조수 1이었던 저는 몰래몰래 그 야들야들한 수육 살점을 끄트머리를 남동생과 함께 손으로 고깃결대로 잘게 찢어서 몰래 김칫소와 함께 집어먹으며 엄마를 도와드리곤 했고요. 그런 저와 남동생의 만행을 알고 계시던(?) 엄마는 김장 준비를 하면서 자르던 무 조각을 계속 저와 동생 입에 넣어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겨울 무라 배처럼 달고 맛있어. 이렇게 생으로 먹으면 속도 편하고 소화도 잘되니까 꼭꼭 잘 씹어서 먹어야 해. 겨울 무는 보약이란다."





며칠 전, 고랑이와 동네 야채 가게에 장을 보러 갔는데 한창 철인 겨울 무가 세일 중이더라고요. 며칠 속이 좋지 않아 고생하던 고랑이를 위해서, 그리고 싱싱한 무를 보니 무생채도 무나물도 해 먹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겨울 무 몇 개를 집어 들어 집으로 돌아왔어요. 무를 깨끗이 씻어서 한토막 잘라서 맛보는 순간 그 겨울철 뿌리채소에서 느껴지는 달큼함에 오물오물 거리며 무를 나박나박 작은 소쿠리 하나 채울 만큼 썰었어요. 윗부분도 알싸하면서 달큼하니 무나물을 하면 정말 딱이겠다 싶어서 살짝 두껍게 채를 썰어서 또 작은 플라스틱 통 하나를 채웠어요.


소고기 무국



소고기뭇국 완성입니다. 기름 더 걷기 전에 간 보다가 한 술 크게 뜨고 말았네요.
세 번은 끓여야 진정한 소고기뭇국이야


살짝 두껍게 채를 썰어놓은 무는 들기름에 달달 볶아서 들깻가루를 아낌없이 넣어준 무나물을 하고 난 뒤, 냄비 바닥에 자박자박 깔린 그 뽀얀 국물에 찬밥을 비벼서 저는 점심으로 챙겨 먹었어요. 하루는 어쩜 이리 빨리 지나가는지 그새 또 저녁 준비를 시작하면서 한 솥 크게 끓인 소고기 뭇국을 또 끓여줍니다.


예전에 해장으로 최고라며, 소고기뭇국을 유난히 좋아하신 제 직장 상사분이 늘 그러셨거든요.

"세 번은 끓여야 진정한 소고기뭇국이야."


그렇게 세 번을 끓여서 맛보게 된 소고기뭇국에 고랑이는 한 입을 먹어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밥을 말아서 먹어야겠어."





그렇게 알아서 소고기뭇국에 밥을 한 술 크게 말아서 무나물도 김치도 야무지게 올려 먹는 고랑이. 밥 한 톨, 무나물 한 조각도 안 남기고, 무나물 국물에 밥 까지 비벼먹고는 오늘 저녁은 아주 속이 아주 편하다면서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고랑이가 '며칠 이렇게 또 먹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저녁상을 정리하는 동안, 저는 후식으로 따로 잘라둔 무 윗동이 한 조각을 강판에 갈기 시작했어요. 강판에 잘 갈린 무에 꿀을 잘 섞어준 뒤, 작은 요거트 컵에 담아 작은 티스푼과 함께 고랑이에게 건네주었어요.


"익숙하지 않은 맛인 거 아는데... 그래도 속 안 좋을 땐 이거만 한 게 없어. 겨울 무는 보약이야."


그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제 머릿속을 울립니다.


"겨울 무는 보약이란다... 꼭꼭 씹어서 먹으렴."


속이 아플 때는 이만한 게 없답니다. 무를 갈아서 꿀을 넣어 먹는 한국엄마들의 지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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