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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anist Garam Cho Apr 13. 2020

낭만의 마지막 황제

[Pianist 조가람의 Classic Essay]


낭만의 마지막 황제 ‘라흐마니노프




‘천재는 모방하는 정신과는 완전히 대립한다.’-칸트

이는 라흐마니노프에 빗대어 볼 때, 매우 맞고, 매우 틀리다. 그는 어찌 보면 매우 모방했고, 달리 보면 매우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고전과 낭만 음악을 매우 모방했고, 모더니즘을 향하던 그 시대의 흐름을 결코 모방하지 않았다.


 모두가 일상과 고전의 전형, 낭만과 익숙한 평균율을 살균하려 할 때, 곰팡이 더덕더덕 붙은 치즈처럼 버텼다. 동료들이 최신 유행이라는 혁신의 옷을 입고 현대의 길을 걸을 때, 누린내나는 진짜배기 구식으로써, 끝내 낭만의 마지막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미술계, 문학계의 흐름 또한 낭만주의로부터 모더니즘과 인상주의를 향하고 있었으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삶의 양태가 크게 달라졌을 그 시기, 스크리아빈이나 프로코피에프와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이 초기, 중기, 후기의 작품에 사용한 음악적 어법이 극명하게 구분됨과는 달리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의 일생에 걸쳐 한결같다.


  교향곡 1번의 실패 후 슬럼프에 빠져 공식적인 작곡활동을 중단했다가, 다시 세상으로 회심의 작품을 들고 나올 때에도, 그는 혁신을 택하지 않았다. 자신이 늘 사용하던 고전과 낭만의 연장으로 깎아 만든 피아노 협주곡을 들고 나왔다.



대작 앞에 침수된 대작이 있었다.

 [Symphony No.1 in D Minor, Op.13]



https://youtu.be/m9lmDVUKQoM


 그가 20살에 완성하고, 22살 초연된 이 곡은 그에게는 20년 존재의 증명이었으리라.

 악보의 첫머리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인용된 성서 로마서 12장 19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를 적어놓았다.

 성서 일지, 안나 카레니나 일지, 이 구절에서 느껴지는 운명이든 선택이든,  원망할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는, 원수가 바로 자기 자신인 이미 벌어진 삶의 결과 앞에서 들끓어 오르는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타인의 시선, 그럼에도 잠시 꿈꿔보는 찰나의 낙관이 뒤엉킨 이 곡은 매우 극적이다.

소리로 듣는 러시아 장편소설과 같다. 흑백 누아르 영화의 배경음악 같기도 하다. 아니다. 인류의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흔하디 흔한 각자의 드라마 같기도 하다.


 트렌드를 좇는 세련됨을 뒤로하고, 예술과 진리, 사람의 진득한 살 섞임으로 대변되는 낭만주의가 자신의 영이 속한 곳임을 알고 순진할 정도로 허식 없이, 자신의 감명과 예술적 상상력을 드러냈다. 벌거벗고, 여실히, 내면의 내밀한 이야기를 이 교향곡에 모두 꺼내놓았다. 이 곡은 20살의 라흐마니노프이다.









흔히 위대한 작품들이 그렇듯 이 곡은 기구한 사연을 가진다. 1897년 초연 당시, 지휘를 맡았던 글라주노프는 음주 연주를 했다는 일설이 있을 정도로, 연주를 망쳐버렸고,  라흐마니노프 본인조차도 “화려한 경력을 쌓으려던 내 꿈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라고 하며 좌절했다.

당시 언론도 ‘지옥에 있는 음악원에서 그에게 이집트의 재앙에 대한 교향곡 과제를 내주었다면, 지옥에서 열렬한 환호를 받았을  작품’과 같은 스크루 테이프적 사르카즘을 쏟아냈다. 라흐마니노프는 크게 좌절하여 그에게 전부이자 저주였을 이 작품의 출판을 포기하고 필사본을 아예 폐기해버렸다.

그로부터 50년 후, 레닌그라드의 서고에서 악보가 발견되고 이 곡의 가치는 재평가되는데, 당시 소비에트의 평론가들은 ‘이 곡은 러시아 음악의 이정표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이때는 이미 라흐마니노프가 죽은 후였다.


 어쨌거나, 라흐마니노프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했던 이 곡의 소명은 따로 있었던 듯, 이 일은 세기의 명곡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낳는다.



세기의 명곡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이 참담히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패잔병이 되었다. 청년 작곡가는 실의에 빠져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았다. 이미 위대한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였음에도, 자신의 참 정체성은 ‘작곡가’라 생각했던 그는 자신감을 잃고 3년간 거의 작품을 쓰지 못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러져버렸다. 여러 시간 스스로 질문하고 또 회의해본 결과, 나는 작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뿌리 깊은 무감각이 날 점령해 버렸다. 나는 낮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 파괴되어 버린 내 생애를 한탄하면서 보내고 있다.
-[Sergei 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 (클래식 명곡 명연주, 황장원)


전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느꼈던 것일지. 그의 일기장처럼 작곡을 포기했다면, 우리가 무엇을 놓치게 되었을지. 다행스럽게도 운명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는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를 만나 ‘자기 암시 요법’을 통해 회복의 과정을 걷는다. 가벼운 최면상태에서 ‘당신은 새로운 협주곡을 씁니다. 그 협주곡은 성공을 거둡니다’라는 문장을 반복하여 듣는 것이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얼마나 간단한 위로였던가! 꺾인 날개와 상한 마음은 이 ‘할 수 있다’는 되뇜으로 회복되었다.


https://youtu.be/YHtfVi4T1sQ

S.Rachmaninoff가 직접 연주한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




 1900년의 가을에 시작되어 이듬해 봄에 완성된 이 곡은 그의 재기에 화려한 봄을 가져다주었다.

알렉산더 질로티와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초연된 이 곡으로 그는 ‘글린카 상’을 수상하였으며 그가 멈추지 말고 가야 할 길에 확신을 더했다.


 그가 작곡하는 동안 어떤 모양새였을지는 이 곡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회심과 재기, 재도약과 찬사에 대한 굶은 사자의 허기, 요즘 말로 ‘영혼을 갈아 넣은 듯한’ 가득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존재의 증명, 유치할 정도로 까놓고 멋진 서정성.

 그런데 이 음악을 듣는 우리가 아마도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 시대에 너무나 흔해서 가치가 희석된 단어인 ‘진정성’이다. 그가 ‘음악으로 증명하겠어, 오로지 음악으로.’하는 결심으로 순수하고 간절하게 입을 닿고 꾹꾹 눌러 적어 내려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의 진정성은 무엇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또 동시에 어쩐지, 모두 알 것만 같다.






 너의 진정한 이야기가 나의 비밀스러운 생의 이야기와 만나, 기괴한 통찰에 기분 나쁘지 않게 들켜버린 속내로, 음악 속 어딘가에서 무릎을 맞대고 공감을 수혈받는다.


그것이 이 곡이 대중성을 획득한 베스트셀러이고,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많은 사람의  마음의 장벽을 무장해제시키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한 이유일 것이다. 도래할 미래에, 스페이스 엑스 혹은 누군가가 성공리에 인류를 다른 행성에 이주시킨 그때에도, 그 외딴 행성에서도, 우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여전히 듣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 곡은 고도의 지적 작품이다.

 어디 하나 방관된 음, 허투루 놓인 음 하나 없는, 낭만의 균형 잡힌 화성들과 조직적으로 잘 직조된 정교한 고전의 골조,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이루는 대위적 선율은 바로크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제안한다.  모든 지성과 어깨를 누르는 체면을 잠시 집구석 어딘가에 내려놓고, 35분 어귀의 시간을 내어 시릴 정도로 순수하며, 용기와 도전, 희망으로 빚어진 진정의 음악에 걸음을 내디뎌 보기를. 시골의 저택에 놓인 나니아 나라로 통하는 묵은 나무로 만든 오래된 옷장처럼, 고전과 낭만의 묵은 재료로 만들어진 그 음악 안이 얼마나 장대하고,광활하고,순수하며 진정어린 세계인지 느끼게 되리라.   



2020년 4월, 소리 없는 전쟁 속 우리에게 고요한 불안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묘하게 얻어진 나만의 지리하며 평온한 시간이 주어졌다.


우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만나자.

함께 그 장대하고 순결한 곳을 유영하자.



추천 연주

https://youtu.be/qdLHv9VPogI Alexis Weissenberg

https://youtu.be/E10PffAkxgM Ivo Pogorelich

https://youtu.be/Pp9B0msjU0w Zoltan Koc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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