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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anist Garam Cho May 28. 2019

"이 봄,협주곡을 들을 의무"

[ Pianist 조가람의 Classic Essay ]


계칩; 만물의 기지개


 시린 외상의 날들과 고독한 내상의 날들의 겨울이 지나니 춘몽이 피어오른다. 거리는 미美를 만들고 기다림은 애()와 애()를 낳았다. 이리도 애달프게 봄이 찾아왔다.

어렵사리 찾아 온 봄은 곧 열기 속에서 춘몽의 잔부스러기를 흩뿌리며 사라질테니, 이 찰나의 아름다움을 붙잡고 누려야 한다는 의지를 태운다. 연천몰각한 피아니스트인 탓,지난 몇 년간 나는 왜인지도 모르고 이끌리는대로 봄이면,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면, 피아노 협주곡을 찾아 듣고, 또 연주를 해왔다. 돌이켜보니 봄을 맞이하는 이 나만의 의식은 베를린의 겨울과 봄을 겪으며 시작되었다. 그 곳의 겨울은 얼마나 지독하던가. 해는 9시가량 떠 오후 3~4시면 어둠이 내려앉는다. 오후7~8시면 가게의 불이 꺼지고 길에는 인적이 뜸하다. 크리스마스 마켓마저 문을 닫은 1월부터 3월까지는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이다.

겨울의 적막함,잿빛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이다보면 유독 두드러지는 삶의 존재하는 모든 부재들. 그 사투의 끝에, 산들바람의 끝자락이라도 스칠새면 그 체멸과 착각의 순간에 누워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끓어오르는 애(哀)는가연물을 필요로 한다. 부재의 유배지에서 쌓인 외로움의 공기가 애이불상을 넘어서기 전에 남는 것없이 태워 봄의 생을 채워넣을 채비를 한다. 이렇게 채비를 하다보면 4월이다.

이렇게 얻기 어려운 마음이 있던가. 매정하게도 유럽의 봄은 좀처럼 쉬이 온기를 내어주지 않는다. 오전에 햇살이 비추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우박이 내리고, 하늘의 동쪽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서쪽은 해가 낭낭하다. 만물이 다시금 생을 맞으려니 그 찬란한 창궐에 부지런을 떠나보다. 외로움과 참회의 거름위에 꽃이 피며 모든 생의 움직임이 요란하다.

소우주 :피아노


 피아노 연주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이룩한다. 피아노는 이를테면 반주와 독주, 주연과 조연, 오케스트라 단원과 지휘자 모두가 공존하는 형태. 피아니스트의 열손가락 중 오른손의 새끼 손가락은 프리마 돈나를, 나머지 손가락은 바리톤을 왼손의 여러 손가락으로 연주하며 왼손의 새끼 손가락은 베이스를 맡는다. 때로 왼손이 콘트라베이스의 가볍고 경쾌한 피치카토를 연주하는 동안 오른손의 일부분은 오보에의 정련된 서정적 멜로디를 노래하며 남은 손가락으로는 바이올린 파트의 16분음표로 이루어진 레가토 선율을 연주한다. 이뿐인가.라흐마니노프라도 연주할 때면 오른손으로 주선율의 악상과 적절한 음색을 조절하면서(노고가 억울하게도 청중의 귀에는 이 멜로디만 들린다.),여섯잇단음표의 해체된 화성을 M.M ♩=144로 속주하는 중에-청중의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음이 빠지거나 실수가 생기면 어렴풋이 아쉽다. 그러므로 거짓없이 연주해야 한다. 역시 노고가 억울하지만 아름다움의 이치는 밸런스인지라.) 왼손은 다섯 손가락으로도 모자란 여섯 개의 음으로 구성된 화성을 잇달아 채워 연주해야 하는 국면에 처하기도 한다. 각 손가락이  여러가지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동안 몸은 테크닉적 어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음악의 큰 흐름을 이끄는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S.Prokofiev Piano Concerto No.2 in G minor Op.16 1st Movement  Cadenza중]


대자연과의 만남을 준비하다.


 -악보라는 이름의 지도


어김없이 봄이 왔고, 어김없이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가 코 앞이다.  대자연과 소우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아니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만나게 된다. 악보를 두 권 편다. 한 권은 두 대의 피아노 편곡보(총보의 중요 성부들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피아노를 위한 2단 오선보로 기록한 악보), 나머지 한 권은 지휘자가 사용하는 총보(각 악기별 또는 성부별로 된 여러 악보를 한데 모아 한눈에 전체의 곡을 볼 수 있게 적은 악보)다. 피아노 악보는 협주곡에서 일종의 분보이기에 전체를 읽어내기에 한계가 있어 총보는 중요한 지도이자 나침반이 된다.


 몇 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터운 총보를 한 장씩 넘기며 대자연의 흐름을 파악한다. 까만 것은 음표요, 흰 것은 종이였던 악보는 어느 새 살아있는 세계가 된다. 모든 것이 무용하지만 가상의 세계의 존재가 창조되었다는 것만으로 인생이 한 단계쯤 흥미로워졌던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을 때의 경이로움이 떠오른다.C.S.루이스가 창조한 세계의 역사,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나가듯 한 인간이 창조해 놓은 위대한 이야기를 읽어 나간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인간군상이 한 데 얽힌 굵직한 역사의 물줄기가 흐르는데, 이를 완벽히 파악하고 암보해야 세세한 사항들을 통제하고 경략할 수 있다. 무대에서 이를 연주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온전히 소리로 재현하는 것이기에 지휘자와 솔리스트의 머릿 속에는 일종의 완강한 질서의 조직화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피아노 악보와 총보를 비교하며 피아노의 소우주가 운영되는동안 대자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핀다. 나름의 분주함으로 각 악기들은 각자의 소리를 만들어내고 그 조합은 섬세하고 유기적으로 조절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피아노가 이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을 때 어떤 악기가 어떤 선율을 연주하는지, 그래서 그 협주는 어떠한 화음을 이루며 그 화음의 분위기와 목적지는 어디인지, 그 다음 장은 어떠한 악기와 합을 이루게 되는지 등의 세부사항을 시물레이션하고 결정한다. 이렇게 인지와 분석을 통한 철저한 선행은 연주자의 인원이 많은만큼 늘어난 변수에 대비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일련의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실황무대에서 그 값어치를 해낸다.


만남,그리고 라이브라는 대모험


- 드디어 실전이다.


나의 움직임에 집중된 모든 공기를 타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콘체르토 라이브 연주동안 무대에서는 제 아무리 정적으로 보이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치열한 눈치싸움과 격렬한 두뇌의 회전, 0.01초를 다투는 스포츠 경기와 같은 민첩한 신체적 반응이 세계대전을 방불케하며 일어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양들이 길을 잃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예기치못한 적수가 불현 나타난다. 물론 이들 덕에 이 모험이 흥미진진하다. 이들 덕분에 콘서트홀 안에 있는 모두가 그 안에 맴도는 긴장감 위에 얹힌 기묘한 박진감의 공기를 느낄 것이다. 나의 경우, 이번 봄,무대에서 새로운 적수가 몇 등장했는데, 연주 직전 드레스의 어깨를 고정하는 끈이 끊어져 무대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바느질을 하고 있었으며,청중석의 맨 앞 줄,시야에 예상치 못한 이가 뇌리에 각인되어 봉인이 풀려버린 마술 상자처럼 마구 피어오르는 공기같은 기억들을 모르는 척하느라 애쓰기도 했고, 리허설 때와 달리 어긋나는 현악기의 피치카토와 플룻의 템포 중 어느 악기에 맞출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갑자기 피아노 솔로의 첫 음이 떠오르지 않기도 했으며(이럴 때 연주자는 속으로 소리없는 아우성, 아니 비명을 지르고 있다.) 유독 중요한 대목에서는 핸드폰이 울려오는 것이다. 실제로는 0.0001초일지도 모르나 체감상으로는 억겁같이 느껴지는 절제절명의 고뇌의 순간. 이 때 악보가 정확히 숙지되어 있고 여러가지 시물레이션으로 탄탄히 준비되어 있으면 보다 즉각적으로,지휘자와 연주자가 서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길 잃은 양을 구출하고 적수에 대응할 수 있다.



모두의 승리를 위하여 특히 솔리스트와 지휘자는 어떠한 순간에도 목자의 위치를 지키고 양 떼를 인도해야 한다. 물론 이 전쟁을 청중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놀라운 기민함과 뻔뻔한 담력은 필수다.



이 모험의 진가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 라이브 연주에서 연주자가 대비해야 할 변수는 바로 음악을 예술로 존재하게 만드는 ‘즉흥성’과 ‘자율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내 연주가 그 날 그 날 다양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피아니스트는 누구든 하나의 곡을 1000번 연주해보고, 1000번의 경험을 통해 듣고,비교하고,판단해야 한다.” _S.Rachmaninoff


무대에서는 연주 당일의 연주자의 신체적 컨디션이나 기분,실황에서 번개같이 찾아 온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 타이밍과 호흡의 변화 등 여러가지 경우의 수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아주 세밀하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보장되지 않은 것, 움직이는 것,완성이 완벽에 갇히지 않는 것의 매혹은 음악에 있어 건강한 변수가 된다. 이는 음악이 악보의 족쇄에 묶여 학문이라는 바다에 잠겨 있지 않도록 한다. 연주자가 백면서생에서 피그말리온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돕고, 음표 안에 잠든 거대한 세계를 깨워 역동적인 현실 세계로,무대 위에 펼쳐내는 신의 지팡이가 된다.연주자들은 이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작은 조각들을 맞추어 간다.그들의 리그에 비밀스런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 눈빛과 호흡의 마법으로, 서로의 음악이 엎치락 뒷치락하며 은하수를 그려간다. 지휘자는무대 위에 현현한 대자연과 소우주의 은하를 통솔한다.



이 봄, 피아노 협주곡을 들을 의무

나무에 핀 연꽃-목련이 숭고한 낙하를 한다. 더이상 귀 옆에 이는 바람이 시리지 않다. 만물의 소성이, 그 현란한 생존의 발버둥이 느껴진다. 이럴 때는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것이다. 절대적인 역동성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조물주가 된 한 피조물의 창조작의 경이를 소름이 돋도록 느껴보는 것이다. 대자연의 시류에 경개하며 지조를 지킬 이유가 없다. 시류를 타고 함께 춤을 추는 것. 그 춤의 끝에 우리, 위대하지만 나약한 소우주는 스스로의 영화로움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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