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끝나고 맞이한 백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에 왔으니 발레 한편 보고 가야 하는데, 예전 여름시즌에는 마린스키발레나 볼쇼이발레 같은 정상급 발레단이 항상 시즌오프 후 해외공연 다녀서 여름에 공연관람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전쟁 및 제재로 해외공연 자체가 막혀서 여름에도 계속 시즌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관객 입장에서 좀 더 풍성한 볼거리가 주어지고 있어요.
러시아에서 싸고 적당한 발레를 보려면 크렘린궁 안에 있는 크렘린궁 발레가 적절하고, 네임밸류 생각하면 마린스키나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가 좋습니다. 저희는 뱀의 머리 보다는 용의 꼬리가 좋기에 마린스키 최저가 표를 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약을 부탁드렸던 기호2번 형님 께서 덜컥 1층 플로어에 앞에서 다섯번째 줄 인당 7200루블 짜리 VIP 티켓을 선물로 주셔서 진짜 깜놀.
제 인생에 이런 VIP석을 언제 앉아 볼 지 모를 정도의 좋은 자리를 예약해 주신 형님께 다시 감사드리며,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마린스키 VIP티켓을 받은 후 입장 전까지 우리 가족이 신경쓴 것은 드레스코드. 학생때에는 드레스코드가 엄격해서 매번 신경쓰고 갔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저는 캐주얼 정장용 상의 자켓을, 와이프도 출근룩을 준비했고, 아들도 여행가방에 남방셔츠를 준비해서 갔어요.
그러면서도 혹시 출입 안되는 거 아냐? 중국사람처럼 보이는 거 아냐? 하면서 걱정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간 드레스코드 개념이 없어진 건지, 사람들 복장이 천차만별. 예전에는 학생들도 한껏 차려입고 오는 게 국룰 이었는데, 이번에 보니 후드티 입고 온 아저씨, 라운드티 입고 온 아저씨도 꽤 보였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아저씨들 빼고는 대부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어요. 혹시 마린스키 가실 한국분들도 최대한 차려입고 가기를 권하나, 어쨌든 옷으로 사람 차별하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외 자리 찾는 건 어렵지 않았고, 한국에서처럼 시작 전에 벨 울리고, 한번 더 울려서 독촉도 하곤 합니다. 단, 주의하실 게 여자화장실 이 모자라서 여자분들은 길게 줄을 서야 하니 화장실 가실 분들 미리미리 다녀오셔야 합니다.
발레 해적은 (적어도 저같은 초심자 에게는) 사전에 줄거리를 파악하지 않고 가면 내용파악이 잘 안되는 난해한 내용이예요.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막은 볼거리도 많아서 시간이 금방 지나가지만, 2막은 솔로 무대가 많아서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고, 3막은 다시 화려한 무대로 복귀.
중간에 두번이나 쉬고, 끝나는 시간은 약 10시쯤 입니다.
일단, 저 개인적으로는 세시간 동안 안졸고 끝까지 직관했다는 데서 저 자신에게 칭찬을 하고, 그만큼 발레 해적이 흡인력은 있는 공연이었다 생각을 합니다.
특히 화려한 의상을 입고 군무추는 장면은 꽤 볼만했고, 발레 처음 보는 아들도 지루해 하지 않고 1막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2막은 좀 지루했고, 3막은 반전이 있어서 아주 흥미진진했고, 다른 관객들도 브라보를 많이 외치면서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공연이었습니다.
많이 이들이 브라보 외치면서 공연자가 커튼을 다시 열고 나와주셔서 저도 공연 끝나면서 사진 많이 찍을 수 있었습니다.
발레리노 김기민으로 보이는 분의 사진도 찍어 놓았는데, 나중에 프로그램북에 보니 동양인이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세계적인 한국인 발레리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네요. 그래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제가 원래 얼굴을 아는 분이 아니니 확실히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기회가 안되어서 얼굴은 못 뵈었지만, 머나먼 땅에서 세계적인 발레단의 주역으로 훌륭하게 자리매김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발레 끝나고 나오니 10시. 몸은 엄청 피곤한데 밖은 아직도 환한 상태였습니다. 역시 백야의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임을 확실하게 느끼는 밤이었어요. 밤인지 낮인지 헷갈리는 밤, 그게 바로 상트의 여름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백야의 도시에서 10시 넘은 시간 상트의 운하 옆을 걸어서 호텔로 걸어가는 경험은 상당히 비현실적 이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온가족이 이 도시에 서있는 지, 언제 다시 이 도시를 올 수 있을 지, 이 평화로움은 너무 과분한 게 아닌지 등등.
아마도 러시아에 온가족이 다시 와서 이렇게 발레도 보고, 백야의 밤거리를 걷는 일도 없을 것 같겠지만, 지금 경험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도 우리 가족이 이렇게 새로운 장면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를 기원했어요.
앞으로도 몇 년간 우리 가족에게 공통적으로 남을 기억이면서, 새로운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고위도의 도시 상트에서의 백야의 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