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보통 매달 20일 경에 이발을 하곤 하는데, 이게 조금씩 당겨지다보니 이제는 15일 전후로 이발을 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2주에 한 번씩 해서 옆머리, 뒷머리가 짧고 깔끔한 상태로 유지하고 싶은데, 그건 좀 오바인 거 같아서 1달에 1번으로 하고 있다.
다음 주말에 친척 동생 결혼식이 있어 미리 머리를 자르고 싶어 오늘 즉흥적으로 미용실에 갔다. 늘 가는 미용실이 있긴 한데 직원이 많아, 자르는 사람이 보통 갈 때 마다 달라지는 편인데, 이번에도 처음 뵙는 분이 잘라주셨다. 자리에 안내해줄 때부터 어쩐지 어리숙해보였는데, 머리를 자르는 손길을 보니 역시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듯 보였다.
다른 분으로 바꿔달라고 할까 하다가 내가 추구하는 헤어스타일이 어려운 편이 아니다 보니 이 정도는 어렵잖게 자를 수 아니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잘라달라고만 설명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다. 손길은 어설펐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자르는 게 느껴져서 그냥 좋은 마음으로 기다렸다.
(실제로 정말 정성들여 잘라서 거의 40분 정도 걸렸다 ㅡㅡ... 평소엔 보통 10~20분이면 자름)
자르고 나서는 솔직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머리야 또 금방 자라니까 하고 편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누구에게든 미숙하고 어설픈 순간들이 있으니. 내 머리가 그 미용사분에게는 능숙해지는 길로 가는 과정이 되길 바랐다.
14.
회사에서 업무 관련해서 요즘 부쩍 회의가 많아졌다. 일주일에 2~3번 하는 경우도 있고, 한 번 하면 2~3시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은 업무를 하면서 회의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한 달에 1번 정도만 업무적으로 필요한 의사 소통만 간단하게 하곤 했는데, 그러다보니 회의의 고통을 잊고 살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업무에 변동이 조금 생기면서 회의가 정말 엄청나게 많아졌다. 회의를 그렇게 자주 하다보니 회의의 단점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회의 시간의 2/3를 쓸데 없는 얘기를 하며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회의 없이 일하는 동안은 효율적으로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회의를 하면서 낭비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러 업무의 효율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많이 본 글들 중 '효율적 업무', '효율적 회의' 등에 대한 내용을 본 기억이 있는데,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회의를 많이하다보니 그런 글들이 왜 필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팀원 전체가 이젠 회의를 한다고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다.
15.
수요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유독 피곤함을 느꼈다.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영양제도 먹고 술담배 안하는데도 이렇게 체력 관리하기가 어려운데,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는 건지. 아침에 일어나는데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오전 일과를 하는데도 무겁고, 점심 먹고 돌아왔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체력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기분까지도 좋지 않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몸이 영향을 받는 면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몸의 상태에 따라 마음이 영향을 받는 게 더 큰것 같다. 몸이 아픈 날만큼 불행한 날도 없다.
16.
김영하 작가가 새 책을 낸 기념으로 네이버에서 라이브 북토크를 진행하길래 일하면서 슬쩍 들었다. 김영하의 소설도 물론 좋아하지만, 그의 에세이를 정말 좋아하는데, (특히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김영하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내가 왜 김영하의 글들을 좋아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김영하의 말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다. PC(정치적 올바름)하다. 개인적으로 PC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옳은 방향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데, PC에 대해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의 주요 골자는 'PC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을 깎아내리고 상처를 주며 재미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저급한 재미일 뿐이다.
김영하는 늘 올바른 것을 지향하며,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 안에 재미가 있어 좋다. 마크 트웨인에 대한 농담을 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17.
회사에서 저녁을 공짜로 줘서 보통 저녁을 먹고 집에 가는 편인데, 대부분 함께 먹는 동료분이 있다. 나와 (위로) 띠동갑인 분으로, 직장 생활은 물론 인생에서도 대 선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만 쓰고 보면 내가 억지로 그 분에게 맞춰서 '식사 접대'를 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 무척 편하고 즐겁게 먹고 있다.
12살의 차이가 나는 상사분이지만 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배려'에 있다. 상사님은 늘 자신이 이번주, 아니면 오늘 시간이 되는지 미리 말을 해준다. 그리고 서로가 시간이 되지 않을 경우가 있어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쓸데 없는 감정 소모가 없도록 서로 배려하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니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사실 이러한 세세한 배려야말로 인간관계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애쓰니 상대와 자존심 싸움을 할 일이 없고, 존중받는 기분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만 해도 함께 하는 관계 속에서 섭섭하거나 화날 일이 없다. 바꿔 말하면 배려가 없는 관계는 관계를 지속할 의미도 없다는 뜻이 된다.
18.
언제나처럼 주말을 맞아 종로에 갔는데, 광화문에 가보니 사람들이 가득했다. 의경들도 평소 대비 훨씬 많아서 오늘 무슨 일이 있나 했는데, 알고보니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추모 행사와 태극기 집회가 동시에 열려서 그런 듯 보였다.
경복궁 정면으로는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추모 행사 무대가 들어섰고, 바로 오른 편에는 나란히 태극기 집회 무대가 들어 서 있었다. 어쨌든 더 넓은 장소와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 행사 쪽이었다. 평소에 토요일에 광화문에 오면 늘 태극기 집회를 위해 모인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감을 느끼며 걷다가, 나와 비슷한 정치적 선호도를 가진 사람들(우리 편)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걷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좋았다.
늘 인터넷에서 문재인 대통령 욕을 하는 사람만 봐서 솔직히 화도 나고 기분도 많이 나빴었는데, 이렇게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북촌에 위치한 전에 다니던 회사의 사무실 근처에 가보았다. 사무실 바로 앞에 자주 가던 커피집이 있어서 그곳도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기억하던 것 이상으로 커피가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종일 종로 인근을 이곳 저곳 쏘다녔는데, 날씨는 조금 흐리긴 했지만(내일 비소식) 미세먼지 없이 공기가 맑고 선선해 정말 걷기에 기분 좋은 날씨였다. 매일이 이런 날이라면 한국에 살기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19.
오늘은 몇달 전부터 예약을 한 '그린플러그드 2019'에 참가하는 날이다. 라인업에 god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god를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함께 가자고 하여 미리 표를 사두었었다. 나도 무척 오랜만에 가는 음악 페스티벌이라 지난 주부터 무척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친 일요일에 비소식이 있어 한 주 내내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빌었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낮부터 가서 돗자리 깔고 놀자는 계획을 전격 취소하고, 느긋하게 저녁 6시쯤 도착했다. (그때도 계속 비는 오고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한강 난지공원에 도착하니 딱 잔나비가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잔나비 - 빈지노 - god의 순서로 공연은 계속됐다.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했는데, 다행히 빈지노에서 god로 넘어가는 때 즈음부터는 비가 오지 않고 선선하고 맑은 날씨가 계속됐다.
가수들의 공연을 본 것도 좋았지만, 팬들의 환호성이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가수든 뭐든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좋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기뻐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